82년생 지영 씨와 72년생 유정 씨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하다가 <다들> 편집진은 책 이야기로 이번 호를 채워보자는 야심(?)을 가집니다. 소심하게 채움 코너를 통해 그 야심을 펼쳐봅니다. <다들>이 펼쳐보는 재미있고 의미있는 책 소개입니다.
이유정 (작가, 웹진 <다들> 기자)

72년생 유정 씨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한 국회의원이 이 책을 읽고 자비로 299권을 사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한 권씩 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다. 제목만 봐선 ‘X세대’나 ‘88만원 세대’ 같은 특정 세대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여자 이야기라고 했다. 유정 씨의 남자 후배는 “여자들은 읽고 나면 ‘이게 뭐?’라고 하는데, 남자들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하는 소설”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읽어보게 된 이 소설은 참 희한했다. 소설이라면 모름지기 특이한 성격의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 처해 난국을 타개하거나 문제를 푸는 이야기여야 하는데, 이 소설에는 특이한 게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지영이라는 주인공 이름도 평범하고, 그녀가 태어나 학교 다니고 대학 졸업하여 취직하고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그 모든 과정이 한국에서 여자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평범함의 연속이다. 마치 평균이 아니면 안된다는 듯 간간이 소개되는 통계에서 벗어남이 없는 삶이다. 그런데 다 아는 그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책 뒷표지에 써있듯 “하나도 낯설지가 않은데 새삼 눈물이 고”인다.
사실 유정 씨는 지영 씨와 다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고, 장녀이고, 미혼이고,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부분, 아니 실은 거의 대부분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 남자들은 모르는 남아선호

남동생의 분유를 할머니 몰래 떠먹던 지영 씨가 언니 은영 씨에게 “언니는 왜 안 먹어?”라고 물었을 때 “치사해서.”라 대답했던 은영 씨의 마음을 유정 씨는 설명해주지 않아도 차고 넘치게 알 수 있었지만, 작가는 그걸 차근차근 밝혀 쓴다.
김지영 씨는 치사하다는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몰랐지만 언니의 기분은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혼내는 게 단순히 김지영 씨가 더 이상 분유 먹을 나이가 아니라거나 동생 먹을 게 부족해진다거나 하는 이유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 하기는 힘들지만 그대로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24p)
이런 부분들이 남자에게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감상을, 여자에게는 ‘낯설지 않은데도 새삼 눈물이 고이’는 감상을 만들어낸 거 아닌가 싶다.

2~3년 전 누군가 페이스북에서 잘 보이지 않는 밥상머리 형제 간 남녀차별(=남아선호)에 대해 글을 썼다. ‘지금이 70년대도 아니고 그런 일이 어딨냐? 조작이다’와 ‘나도 겪어봤다’는 댓글이 정확히 반반 달렸는데, 그 중 전자의 댓글을 단 사람 중에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어린 김지영 씨는 동생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은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터울이 져서 그런지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돌봐 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었다. (25p)
유정 씨는 소설 속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그 페이스북 댓글 사건이 떠올랐다.

: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이렇게 어린 시절을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지영 씨는 대현 씨를 만나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하게 된다. 혼인신고를 서두르는 신랑이 좋아서 “뭐가 이렇게 급해? 혼인신고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라고 농담한 지영 씨에게 대현 씨는 소설 내용 중 가장 서늘했던 대사인 “마음이 달라지지.”라는 소리를 한다. 하… 유정 씨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런 말에 마음이 구만리 달아나는 느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바뀐 혼인신고서의 5번항(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에 스스로 ‘아니오’ 체크를 하면서 지영 씨는 생각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김지영 씨는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132p)

: 아이를 낳는 건 여자에게 선택권이 있어야 하지 않나?

열일곱살 때부터 독신을 외쳐왔던 유정 씨는 2008년부터 호주제가 폐지된다는 정부 발표에 “나는 결혼을 하더라도 2008년이 넘어서 할 생각”이라고 공언했고, 그 2008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싱글인 유정 씨 같은 여자들과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들에게 세상은 “이기적이다, 니네 부모한테 무슨 문제 있느냐,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다”는 소리를 대놓고 무례하게 한다. 유정 씨는 이제 막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 너무나 길고 힘들며 결말이 불확실한 일을, 앞으로 최소 50년간 재정적인 출혈과 온갖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비이성적인 일을 왜 시작했냐고 비난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다. 아이 없는 여자들은 그렇게 뻔뻔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근거 없는 부당한 말들을 묵묵히 들어야 한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28p)
주변인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만든 행정자치부나 채용시 스펙을 위한 휴학, 연수, 자격증 취득에 불이익을 주거나 고스펙 여성들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걸 저출산 정책이랍시고 내놓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처럼 온 나라가 나서서 난리들이다.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에선 유정 씨가 몰랐던 진실을 알려준다. 결혼해서 여자들이 임신하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남편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남편의 애정을 받고 싶어서’라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들이 첫 아이를 낳은 후 파경을 맞는 비율이 가장 높다는 진실. 첫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태어나 처음 하는 경험인데다, 예상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유정 씨는 이 부분에서 첫 딸로서의 죄책감마저 느꼈다.

어쨌든 아이 낳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논의가 활발해져야 하는 까닭은 엄마가 됨으로써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 엄마가 될 것인지 안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283p)
물론 이런 선택권(흔히는 낙태권이라고 말한다)에 대해 종교계는 태아의 생명권을 가지고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맞서고 있다. 자기들이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직장은 견딜 수 없으면 사표를 쓰면 되고 결혼생활은 힘들면 깰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되기로 한 결정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평생 간다.(192p)
여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재 헬조선의 출산율이 곤두박질치기만 할 뿐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지도라니! 가상현실 결혼앱이라니! 어느 판사님의 말씀처럼 여자들은 쓰나미를 일으키고 있는데, 한가하게 해변에서 조개껍데기 줍는 소리하고 자빠졌다.

: 그 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

유정 씨는 아이 낳기를 포기했지만, 소설 속 지영 씨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한국의 거의 모든 가정이 그렇듯 직장을 관두고 독박육아를 시작한다. 그런 지영 씨를 위로한답시고 남편 대현 씨는 “내가 많이 도울게.”라고 한다. 지영 씨는 버럭 화를 낸다.
“그 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144p)
소설 읽다 간만에 사이다 마신 것처럼 가슴이 뻥 뚫렸다. 물론 착한 지영 씨는 이렇게 뱉어놓고 바로 후회를 하지만 말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라는 발칙한 제목의 책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을 찾은 데 불과하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이다.(32p)
애덤 스미스는 결혼을 안했고, 어머니가 평생 같이 살면서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경제학에서 어머니의 노동은 계산되지 않는다.
남성이 노동한 결과는 측정할 수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여성이 노동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털어 낸 먼지는 어느새 다시 쌓인다. 밥을 해 먹여도 금방 또 배고파한다. 아이들은 재우면 다시 일어난다. 점심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를 마치면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이제 또 설거지를 해야 한다. 가사노동은 그 성격상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52p)
GDP를 높이려면 옆집에 가서 살림을 해주고 돈을 받으면 된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정도이니, 그 노동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지 알면서도,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랑’이나 ‘돌봄’으로 신성시만 하지 값을 매길 수 없다며 회피해왔다.
10여 년 전, 글을 쓰며 독신으로 살겠다는 유정 씨에게 유부남 오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니가 글을 쓴다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보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대단한 경험이겠니? 글이 훨씬 더 깊고 좋아지지 않겠니?”
그 말을 듣고 유정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런데 정작 글을 쓸 물리적 시간은 있을까요?”
그 오빠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 둘을 키우는 그 오빠의 부인이 더 잘 알 것이다.

: 인간은 경제학으로 정의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여자들의 노동에 값을 매기자는 이야기를 하는 책인가? 아니다. 사람을 보는 방법을 바꾸자고 한다. 경제학은 돈에 대한 학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경제학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피는 학문이었다. (22p)
그런데 주류 경제학이 사람을 보는 관점이란, 모든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었고, 그 ‘모든 사람’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여성의 경험은 보편적인 것과 항상 별도로 취급된다.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출산에 관한 책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혹은 땅에서 버섯처럼 솟아난 사람들이 태어나자마자 서로 간에 사회 계약을 체결하는 것에 관해 쓴 철학자의 책을 읽는다. (242p)
즉 ‘보편적 경험’의 기준이 남자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의 도전>에도 잘 나와 있다. 페미니즘의 ‘페’자만 나와도 부르르 떨면서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하는 남자들은 ‘양성 평등’을 위해 여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가사 노동, 자녀 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 왔던 재생산 노동은 경시되고 비하된다.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179p)
여기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역사에는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적 자본에 투자하는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219p)
즉, 보편적 인간이란 남자 노동자에서 자기 계발하는 인적 자본으로 바뀌어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합리적이고 유능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자신을 계발하는 인간) 과 달리 실제 인간은 항상 아프고 피곤하며, 때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도덕적이라는 이유로 하기도 하고, 엄마의 몸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했고, 어린 시절 누군가 만져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경제학의 이상적 인간형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적 인간형은 모든 인간형의 지표로 끊임없이 말해진다.

지영 씨는 아이를 낳으면서 회사를 그만두는데, 그때 회사의 대표를 이렇게 이해한다.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는 없다. (123p)
많은 여자 직장인들이 이 논리에 굴복하고 회사를 떠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을 경제적 측면에서만 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닌데, 자본주의가 모든 방면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지영 씨처럼 (퇴사를) 받아들이거나 유정 씨처럼 (결혼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돈 벌어다주는 남편이 있는데 뭐가 문제야?”라며 불난 가슴에 기름을 붓는다. 1500원짜리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마셨다고 지영 씨를 ‘맘충’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처럼.
무엇이 의존이고 누가 누구에게 기생해서 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항상 정치적인 문제였다.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가, 어머니가 애덤 스미스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282p)

: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 – 여성주의

페미니즘이 실은 남녀의 차별을 논하는 학문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법론이라는 걸 유정 씨가 알게 된 건 <페미니즘의 도전> 덕분이다. 여기서 여성학자 정희진은 “남자도 간호사가 될 수 있고 여성도 트럭 운전사가 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의 의사를 무시한 것이다.” 등의 의견조차 과격한 여성주의로 여겨진다. 위 사례는 엄밀히 말해 여성주의라기보다 개인의 의사 존중에 가깝다. (15p)고 했다.
그렇다. 여성주의는 그런 협소한 개념이 아니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50p)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들불처럼 번졌던 페미니즘 열풍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들은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 등의 얇고 위트있는 외국 페미니스트들의 책이 한 몫을 했다. 그 책들이 좋았다면 <페미니즘의 도전>도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제목도 어려워 보이고, 재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것 같은 책이라 유정 씨도 저항을 이기고 이 책을 읽기까지 1년 이상 걸렸지만, 한국의 수많은 산재한 현안들(가정폭력, 성매매, 군대, 인권, 노령화)을 여성주의의 렌즈로 보면 어떻게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좋은 책이란 읽고 난 뒤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책이라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다.
글쎄… 지금의 82년생 지영 씨에게는 어떻게 읽힐지 잘 모르겠다. 고통을 가중시키는 책이 될지,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책이 될지. 혹시 상처받더라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는 법이며, 상처를 통해 인간은 성숙해진다는 걸 감안하면 어느 쪽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 이 글에 소개한 책
–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 민음사)
–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 (수지 라인하르트 | 수북)
–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카트리네 마르살 | 부키)
–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 교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