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즈 오브 인문학

– 21세기의 인문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유쾌한 손길, ‘인문학협동조합’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은 대학, 기업, 문화센터 등에서 특정한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고급 교양이 아니라 TV 예능프로그램의 핵심 소재로까지 쓰일 만큼 대중화되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강사나 강연자들이 저마다의 인문학적 지식을 콘텐츠로 만들어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애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개개인의 수강 경험이 많아질수록 이미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내용이나 중복되는 콘텐츠의 수도 점점 증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풍요 속의 빈곤’ 문제에 협동조합을 만들어 대응하는 독특한 학자들이 있다. 자신들의 취향과 지식을 인문학에 접목하며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기꺼이 달려가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인문학협동조합(이하 인협조)’의 조합원들이다.

 

7월 20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인문학협동조합 강의장에서 열린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에서 오영진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강의교수가 ‘짤방의 발생과 사용에 대한 문화기술학적 고찰’이란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김홍구

섭씨 35도의 벽이 깨지며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었던 지난 7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인협조의 강의장은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이하 2기)’의 세 번째 강의 준비로 분주했다. 7월 31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2기에서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1인 미디어, 온라인상의 페미니즘 등이 우리들의 감정, 언어, 존재양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한 구술과 담론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겨울에 열렸던 1기는 게임, 신기술, 웹 소설 등을 주제로 하여 “뉴미디어 전반에 대한 인문학적 비평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 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2기부터는 본격적으로 각론의 영역에 진입하여 뉴미디어라는 용어가 포괄하는 다양한 하위영역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이루어진다.

당일 강의를 맡은 오영진 교수는 “인협조는 아직 논의가 충분하지 않거나 정제되지 않은 ‘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고 말하며 “남이 하지 않는 것이나 가기 싫어하는 곳에 가는 것이 인협조의 모토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조합원들이 직접 강의를 해도 되지만, 제작된 프로그램에 적합한 사람들을 모아서 전체 기획 안에 배치를 해보는 것 역시 인협조의 작업이자 메시지이다”라고 첨언했다. 뒤이어 지난 뉴미디어 비평 스쿨 1기의 첫 강의를 맡았던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는 “2006년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모두 없어지고 맥이 끊겼던 게임 문화담론이 201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다시 형성되고 있다”며 “인협조가 그러한 담론 형성에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2기의 컨셉에 맞게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배경으로 제작된 포스터 ⓒ김홍구

누군가가 하고 있고,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에게 뉴미디어의 영역은 매우 흥미로운 ‘개척지’였다. 그런 곳에 인문학자들이 개입하여 의미를 만들고, 설령 실패할지라도 새로운 해석을 해보려 노력한 인협조의 시도는 이제 ‘뉴미디어 비평 스쿨’이라는 프로젝트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인협조의 ‘개척정신’은 2013년 조합 출범 당시 제작되었던 ‘오덕인문학’, ‘연애인문학’에서부터 ‘기계비평’, ‘한국사회 테크노 컬처론(論)’ 등을 지나 최근 서울자유시민대학의 네트워크기관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촛불 이후의 한국’까지 이어져왔다. 이처럼 현재의 한국사회와 문화 속에서 비평이나 담론이 아직 미약하거나 부재하는 영역에 인문학의 시선으로 다가서서 콘텐츠 화(化)하는 것은 인협조의 주요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인협조는 단순히 참신한 소재로 참신한 강의를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는 ‘콘텐츠 제작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강부원 총괄이사는 “인문학은 상아탑 안에서만, 대학을 위해서만 연구되는 학문이 아닌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교양이며, 사회 속에서 구성되는 지식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학문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이나 발언을 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부원 총괄이사의 주장에 오영진 교수는 “향후 인협조는 장애인들을 위한 인문학적 장치를 만들고 싶다”라고 첨언하며, “이를 위해서 우리 강사들도 장애인들의 민감성, 감수성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공부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인협조는 오는 8월부터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과 함께 장애여성네트워크,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서대문종합장애인복지관 등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문학’ 사업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의 운영에 중점을 맞춘다.

 

오영진 평론가의 강의에 앞서서 강부원 인협조 총괄이사가 학습자들에게 인사말을 건네고 있다. ⓒ김홍구

지역의 기관, 자치기구, 도서관, 재단 등과의 연계를 통해 인협조의 활동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학습자의 연령대나 사회적 배경 또한 점점 다양해져왔다. 이에 대해 오영진 교수는 “일용직이나 극빈층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참 높은 벽을 느꼈고, 그만큼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한 현실은 강사들이 공부하고 사유하는 방식부터 바꿔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무엇이든 검색만 하면 다 찾아볼 수 있는 오늘날의 세상에선 개인의 지식이나 소스가 갖는 위치, 위력도 점점 하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래사회의 교육 현장에서는 정보와 사람 사이를 연결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큐레이션’,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인협조는 그러한 미래를 대비해왔고, 그 어느 때보다도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에 대해 다방면에서 깊고 치열한 사유를 이어오고 있다.

“경험의 차이는 사유의 차이를 낳기 때문에 학습자들이 어떤 부분에서든 강사보다 훨씬 더 깊은 측면을 갖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오영진 평론가의 주장에는 이 시대의 수많은 인문학계 종사자(강사, 기획자, 학자 등)들이 곱씹어봐야 할, 혹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을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7월 20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인문학협동조합 강의장에서 열린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에서 오영진 문화평론가가 ‘짤방의 발생과 사용에 대한 문화기술학적 고찰’이란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김홍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