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만 있는 곳이 아니랍니다 – 국립한글박물관

 

어린이도, 외국인도, 한국 성인도 환영!!

이렇게 시작한 한글박물관과의 만남. 비록 늦게 만났지만, 나는 금세 한글박물관의 매력에 빠지고 만다. 어린이의 한글교육과 외국인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겠다는 의도가 곳곳에 흘러 넘쳤고, 그런 만큼 관람객 중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과 외국인들의 숫자가 많았지만, 어린이 아니고 외국인 아니라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했으니.

 

 

한글박물관 가는 길 & 층별 구성

4호선 이촌역에 내려 반가사유상과 고려청자 라이트 아트가 고급스럽게 점멸하는 통로를 무빙워크를 타고 이동하여 중앙박물관을 왼쪽에 두고 군데군데 서있는 ‘한글박물관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오다보면 앞쪽이 살짝 들린 듯한 첨단 구조물을 만난다. 여기가 3층짜리 국립한글박물관이다.

 

 

여기서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2층 상설 전시실에 도착한다. 2층에서 상설전시를 보고 옆의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하면서 한글로 만든 예쁜 디자인의 문구류와 상품을 구경하며 체력을 비축한 후, 3층으로 가면 기획전시실이 있다. 기획전시실 옆에는 한글놀이터도 있다. 지금 기획전시실에선 ‘나는 몸이로소이다’라는 개화기 한글 해부학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층에는 한글도서관이 있다. 한글 도서관 옆에는 테이블이 두세개 있어 다리를 쉬었다 갈 수 있다.
최근 중앙박물관 쪽을 경유하지 않고 한글박물관 쪽으로 바로 올 수 있도록 출입구가 만들어져 버스(400, 502)를 타면 바로 앞에 내려 가깝게 걸어 올 수 있다.

 

 

한글의 역사를 세계사와 함께 보는 상설전시실

자, 그러면 2층 상설전시실부터 들어가볼까? 여기는 ‘한글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한글의 역사에 대해 보여주는 곳이다.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쉽게 익혀서 편히 쓰니’, ‘세상에 널리 퍼져 나아가니’의 3부로 구성해 한글창제, 언문이 널리 퍼지던 모습, 개화기 이후 현대에 이르까지 한글의 발전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이두, 향찰 등의 차자 표기를 쓰다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이후에 백성들이 언문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결국 모든 국민들이 한글을 쓰게 된 역사가 각종 자료와 함께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다.

 

 

용비어천가나 천자문은 복제품이지만 월인석보, 각종 언해, 보물 163호 선종영가집 언해 등 자료 중에는 진본도 많다. 서책뿐만 아니라 한글이 쓰여있는 도자기, 인쇄 활자, 놀이도구, 타자기 등 다양한 물건들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1부 초입에 한글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려한 곡선 코너가 있는데, 위쪽에는 국내 역사, 아래쪽에는 세계사가 연도별로 나와 있고, 그 가운데 눈높이쯤 한글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미니어처와 함께 배치되어 있다.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한글이 탄생했고, 최초의 한글 사전이 만들어졌는지, 이 코너만 보면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한글 금석문은 경고문

그 중 눈에 띄는 미니어처 설명을 한번 보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나 주시경 선생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문건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이문건과 한글 영비’라고 적힌 코너를 보면, 조선중기 이문건이라는 문신이 부모님 묘에 한글로 된 비석을 세웠는데, 이게 현존하는 한글 비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근데 그 내용이 ‘이 비는 신령한 비라. 범하는 사람은 화를 입으리라. 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노라’이다. 즉,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이 비를 훼손할까봐 한글로 적어놓은 경고문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한글이 협박하는 경고문이라니! 어쩐지 빙그레 웃음이 난다. 나는 최근 <서울선언>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문건의 영비를 다시 만났다. 노원구에 있는 이 비석 사진을 보며 괜시리 반가웠다. 이렇게 한글박물관에서 알게 된 사실이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할 때 교양이 되기도 한다.

 

 

정조가 네 살 때 쓴 귀여운 손편지

양반들은 아직 한문을 쓰고 백성들만 언문(이라고 폄하된 한글)을 쓰던 시절, 한글은 외국어 공부, 종교, 요리법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었다. 전시실에는 몽골언해, 떡볶이 만드는 법, 동학가사, 사주풀이책 등의 한글문서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몽골어 사전이 있었고,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승경도’라고 하여 윷놀이판처럼 어린이들이 벼슬이름을 익히는 놀이판도 있었고, 마지막 노랫말을 흩어놓고 진행자가 시조의 첫부분을 읊으면 그 시조의 끝부분 노랫말 카드를 찾아 맞추는 시조놀이 카드도 있었다. 참으로 운치있는 놀이가 아닌가 싶다. 나는 한글이 양반의 글자가 아니어서, 실용적으로 모든 백성이 즐겨 썼던 문자여서 참 좋다. 여러 전시물 중 왕이 직접 쓴 글이 있었는데, 바로 정조가 4살 때 큰외숙모에게 보낸 편지다. 글자가 어찌나 귀여운지 보고 있으면 저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전시된 ‘정조 어필 한글 편지첩’은 어린 시절부터 재위 시절까지 16건의 편지가 있어 정조의 한글 필체 변화도 엿볼 수 있다.

 

 

100번이나 인쇄된 한국인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춘향전

세월이 흘러 방각본과 딱지본 소설이 나온다. 방각본이란 목판인쇄로 찍어낸 소설을 일컫는다. 이전까지는 필사(베껴쓰기)를 통해 소설이 출판되었는데 이렇게 하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목판인쇄를 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목판인쇄가 전주와 서울에서 이루어져, 전주에서 만든 것은 완판본, 서울에서 만든 건 경판본이라 불렀다. 딱지본은 방각본 보다 후대에 나온 것으로 컬러 인쇄한 소설이다. 작고 가볍고 알록달록하니 예쁜 이 책은 가격이 싸서 육전소설이라고도 불렸다.

 

 

방각본와 딱지본을 통틀어 가장 많이 출판된 소설은 무엇일까? 바로 춘향전이다. 전시 코너 중엔 ‘백번 다시 태어난 춘향전’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코너가 있었다. 이 수많은 춘향전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조있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했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문, 잡지 코너를 지나 후반부로 가면 국어 교과서, 한글과 문학, 한글과 광고, 한글 정보화, 타이포그라피 등 현대까지 한글의 발전을 볼 수 있다.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386컴퓨터에 이르기까지 한글자판의 변천도 볼 수 있었고, 과자봉지나 슈퍼마켓에서 흔하게 만나는 한글 브랜드의 타이포그래피까지 직접 눌러보고 체험할 수 있는 코너들도 요소요소에 있다.

 

 

어린이와 외국인을 위한 한글놀이터 & 한글배움터

2층 구경을 다 하고, 3층으로 올라가면 한글놀이터와 기획전시실이 입구를 마주보고 있다.
노란색 입구가 인상적인 한글놀이터는 5세 이상의 어린이들이 놀면서 한글을 익히는 곳. 방석, 운전석, 미끄럼틀 등 다양한 놀이기구들이 한글과 결합되어 있다. 이곳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단체예약하여 이용할 수도 있다. 한글배움터는 한글을 잘 모르는 어린이와 외국인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스크린에 뜨는 동영상, 모니터 화면 등을 터치하면 쉽게 한글의 원리를 깨치고, 한글을 써보도록 도와준다.

 

 

큐레이션이 뛰어난 한글박물관 기획전

기획전시실은 매년 분기별로 새로운 기획 전시가 마련된다. 내가 처음 봤던 ‘광고 언어의 힘’ 외에도 이제까지의 전시를 훑어보면 ‘꼴꼴꼴 한글디자인’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다 – 소설 속 한글’ ‘한글 편지, 시대를 읽다’ ‘한중일 서체 특별전’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 – 덕온공주 한글 자료’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흥미로운 전시가 많다. 전시 두 번 봤다고 이렇게 단언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을 운영하는 큐레이터는 진짜 능력있는 분인 것 같다. 흥미로운 컨셉을 잡는 솜씨도 뛰어나지만, 전시를 보고 나면 정말 깨알같이 성실하게 준비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기획전시 ‘나는 몸이로소이다’를 한번 보자. ‘개화기 한글 해부학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전시는 입구에 ‘손탁호텔 어느 00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일단 흥미를 끈다. 개화기 손탁호텔에서 누군가 살해당한 것이다. 인테리어는 당시 손탁호텔을 재현해놓았고, ‘죽음’에 걸맞게 조명이 시퍼렇다. 그 때문에 어린 꼬마들은 무서워서 안들어가려고 하긴 했다. 전시장은 손탁호텔 분위기에 맞게 몰딩과 조명조차 고풍스러웠고, 긴 복도, 퍼런 조명 아래 신체 스크린 등 일관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컨셉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내용이다. 과거 조선의 법의학서, 검시를 할 때 사용했던 도구들을 깨알같이 모아놓았다. 법의학에 이어 동의보감 등 의서가 나오고, 마지막엔 서양의 해부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도 보여준다. ‘몸’이라는 키워드로 법의학, 검시, 해부학, 건강, 동의보감, 황제내경 등이 연결되고, 심지어는 소설이나 전래동화에서 사람의 신체나 의학에 관련된 부분까지도 일일이 가져와 보여준다. 거기서 수십년만에 다시 만난 계몽사판 ‘토끼전’은 어찌나 반갑던지! 특히 감탄해마지 않았던 코너는 ‘몸을 정의하다’. 우리 몸의 각 기관을 과거엔 어떻게 불렀는지 보여주는 코너인데, 심장, 귀, 눈 등의 단어가 과거 문서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각 문서에서 따와서 집자하여 배치해놓았다. 그 글자들의 벽을 보고 있으면, 저 글자 하나하나를 고르고 편집했을 기획자의 고군분투가 눈에 보인다. 웬만한 미술전시 큐레이터는 저리가라 싶은 근면성실함이다. 나오는 길에 이런 글이 만나 읽고서 울컥 감격에 젖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을 우리말의 질서와 구조에 맞게 옮겨 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는 어려운 의학용어는 일본의 한자어를 사용했지만 서양의학의 낯선 개념을 우리말글로 쉽게 전달하려고 애썼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식 한자어로 바꾸었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한자를 함께 적으며 우리말로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이고자 수차례 고민하고 노력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오늘날, 110여 년 전의 그들처럼 한글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우리말을 풍성하게 만들려는 열정과 노력을 이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몸이로소이다’ 전시는 10월 14일까지 열린다니, 꼭 한번 가보시기를!

 

 

가을소풍 가기 좋은 한글박물관

2층과 3층의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만 제대로 꼼꼼히 봐도 반나절은 훌쩍 지나간다. 전시를 보고 아픈 다리를 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2층의 한글 디자인 굿즈를 파는 샵에서 예쁜 디자인의 문구류도 구경하고, 옆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 아니라면 1층의 한글도서관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책 한권 뽑아 들고 앉아 읽어도 좋겠다. 다만 한글도서관은 공휴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하니 참고하자. 이렇게 구경하고 나올 때는 새로 생긴 한글박물관 전용 출입구로 나와보자. ‘국립한글박물관’ 글자로 만든 나지막한 철문도 예쁘고, 그 앞에 재개발 구역에서 가져온 벽돌로 만든 버스정류소도 예쁘다. 돌아나오는 길까지 완벽한 코스다. 게다가 이 모든 게 무료!

 

한글박물관은 단지 한글 문서만을 전시하지 않는다. 관련이 있는 문화재, 과거의 소도구들, 그를 통한 역사까지 관통한다. 또한 터치스크린을 누르거나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체험 코너가 많아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참여하여 즐길 수 있다. 단지 한글박물관에 왔을 뿐인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구경하러 왔다가 곁다리로 쓱 훑고 가기에는 아까운 곳이라 ‘여기도 배움터’ 코너에 추천해 본다. 한글날을 맞아, 혹은 가을을 맞아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면 국립한글박물관에 가보자.

 

홈페이지 : www.hangeul.go.kr
개관 시간 : 10시~18시 (토요일은 21시)
휴관일 : 새해 첫날, 설날 당일, 추석 당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