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2018년에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일까?

도시 전체가 배움의 터전이 되고 시민 모두가 더불어 배우는 도시,
삶과 배움의 경계가 없는 서울은 학교입니다.
학습하는 시민, 성장하는 도시를 위해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이 함께합니다.

<다들>이 서울은 학교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매월 서울자유시민대학, 모두의학교, 동네배움터 소식을 전합니다.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이 운영하는 각양각색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재미난 이야기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서울자유시민대학 가을학기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폭염이 지나고, 날씨도 좋고, 각 학습장마다 듣고 싶은 강좌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으니, 지금이라도 수강신청 페이지에 들어가 한 강좌 한 강좌 똑똑 따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인문강좌들 중 가장 먼저 마감되고, 청강 요구가 많고, 언제 또 다음 강좌가 열리는지 문의가 쇄도하는 강좌는 ‘페미니즘’이라는 머릿글을 달고 있는 강좌들이다. 2016년 이후 페미니즘의 거대한 물결이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중이니까.

사실 내가 학교를 다녔던 1990년대도 페미니즘의 시대였다. 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여성학개론이 교양수업에 포함되었고, 모든 단과대에 여연(여학생연합)이 있었고, 문학계에서는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등 새 시대를 이끌어갈 여성소설가들이 나왔고, 많이 팔렸다.

그래서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보는 한국 문화론’이라는 강의를 듣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문학전공자이고, 페미니스트니까.

 

 

한국 문학계의 주류 작가와 독자는 모두 여성

중년부터 청년까지 남자 청강생들이 뒤쪽을 점령하고 있는 강의실에 들어갔다.
오늘은 ‘신여성의 얼굴들-스캔들을 넘어 자기서사로’라는 제목의 강의였다.
강의를 듣다보니 처음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됐다. 나는 강경애도, 나혜석도 읽은 적이 없고, 심지어 장안의 화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조차 보지 않는 시청자였다. 1930년대의 문학이란 나에게 신세계. 모르는 건 배워야 한다. 얌전히 듣고 공부하자.

 

강사님은 2017년 국민독서 실태조사 통계를 보여주며 강의를 시작했다. 2017년 대한민국 사람은 1년 동안 평균 8.3권의 책을 읽는다. 성별로 나눠보면 한국문학의 주요 독자는 여성들이다. 독자뿐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면 한국 소설 중 10위권에 든 책은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덕혜옹주>(권비영), <도가니>(공지영)다. 20위권으로 확대하면 <정글만리>(조정래), <즐거운 나의 집>(공지영), <7년의 밤>(정유정)이 추가 되는데, 이 중 단 한권을 빼고 전부 여성작가들이 쓴 책이다. 2016~2018년까지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이 백만부 가까이 팔렸다.

그런데도 한국 문학사는 이성애자-남성-비장애인-지식인들의 문학을 주류라고 해왔다. 김훈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한국 문학계는 열렬히 환호했다. 황석영 이후 대가 끊기다시피한 ‘진짜 문학’이 드디어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공지영은, 신경숙은 ‘진짜 문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으으으…애증의 김훈! 나도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좋아하는 독자다. 그러나 그 소설들 안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한두 명 나오는 여자는 그 놈의 젓국냄새를 풍기며 육체로 존재하다 사라질 뿐. 무슨 문학상을 받았다는 <언니의 폐경>을 보고 기함하기도 했는데, 아내에게 생리대 어떻게 가는지 한번만 물어봤어도 그런 이상한 장면은 쓸 수 없었을 거다. 더 놀라운 건 그런 말도 안되는 소설에 상을 준 사람들. 분명 그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늙은 남자들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내가 읽은 김훈의 마지막 소설은 <내 젊은 날의 숲>인데, 군대 이야기만 줄기차게 하는 20대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걸 읽고 욕을 한바가지 퍼부은 후 다시는 김훈을 읽지 않는다.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은 신여성인가?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애기씨 고애신은 신여성인가?

단아하게 땋은 머리와 한복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계급 타파를 외치고 총을 든 모습을 보면 신여성 같다. 근대는 개인을 발견한 시대로, 드라마에서 고애신은 혼자 길을 걷는다. 조선시대 여인은 혼자 길을 걷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미 개인화된, 즉 근대적 여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스터 션샤인>을 볼 때 그녀가 신여성인가 아닌가, 고증이 잘못됐나 잘됐나를 볼 것이 아니라 왜 2018년에 그 시대를 소환했는가를 봐야 한다. 그녀 고애신은 다분히 2018년 우리의 욕망을 위해 소환되었다.

아하…그렇구나. 왜 김은숙이 경성시대를 불러왔나 했더니, 그 욕망은 지금의 욕망이란 말이지. 뭔가 알 것 같았다.

 

 

신여성에 대한 말이 아니라 신여성이 한 말을 보자

강의는 본격적으로 1930년대로 들어간다. 신여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 나혜석. 그녀는 조선 최초로 구미유람을 한 여성이고, 최초의 여성 전업 화가였으며, 죽을 때까지 글을 썼던 여성이다. 신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스캔들로 소비된다. 스캔들이란 신여성에 ‘대한’ 말이다. 그러나 진짜 신여성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신여성에 대한 말이 아니라 신여성이 ‘한’ 말을 봐야 한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나혜석이 쓴 ‘이혼고백장’, ‘모(母)된 감상기’, 소설 <경희>에 나오는 구절들을 살펴보며 신여성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나는 올 초 덕수궁미술관에서 했던 ‘신여성 도착하다’전에서 나혜석의 ‘이혼고백장’, ‘모(母)된 감상기’를 읽어봤고, 직접 그린 만화도 봤다. 나혜석과 최린의 스캔들로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는 과정이 신문지상에 스캔들로 중계되자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을 직접 써서 진실을 알리며, 스캔들을 타파하고자 했다. 또한 임신해서 아이를 낳으면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우러나는 게 아니라 아이와 오랜 시간을 보내며 양육하다보니 길러지는 것이 모성애라고 경험을 통해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스위트 홈은 신여성들의 이상향

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는, 예상한 대로의 신여성이다. 그런데 소설 <경희>에 나오는 신여성의 살림에 대한 태도는 생소했다. 소설 <경희>에는 도쿄에 가서 교육을 받고 온 주인공 경희가 부지런해지고 친절해지고 청소도 과학적으로 하자 엄마가 여자아이에게도 교육시키기를 잘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전에 경희의 소제 방법은 기계적이었다. 동쪽에 놓았던 제기며 서쪽 벽에 걸린 표주박을 쓸고 문질러서는 그 놓았던 자리에 그대로 놓을 줄만 알았다. 그러니 이번 소제 방법은 다르다. 건조적이고 웅용적이다. 가정학에서 배운 질서, 위생학에서 배운 절이, 또 미술 시간에 배운 색과 색의 조화, 음악 시간에 배운 장단의 음률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위치를 전혀 뜯어고치게 된다’

즉, 여자가 교육받으면 콧대만 높아지고 못된 망아지가 되는 줄 알지만,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을 살림에 적용하는 훌륭한 안주인이자 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의 페미니즘과는 뭔가 핀트가 다른 것 같다.

‘스위트 홈(sweet home)’이라는, 부부 중심의 안락하고 사랑과 휴식이 있는 가정은 1930년대에 태어난 이상적 개념이다. 이전까지 한국의 가정은 수많은 친척과 종이 기거하는, 개인의 공간이라고는 없는 대가족이었고, 이는 봉건적인 여성들의 공간이다. 신여성이 안주인이자 양육자로서 거하는 공간이 바로 스위트 홈이다. 직접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입히는 것이 신여성들의 장점이자 주장하는 바였다. 이전까지는 안주인과 양육자가 달랐다. 조선 양반가의 안주인은 아이를 낳기만 했을 뿐 돌봐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스스로 입히고 먹이고 돌본다는 개념은 1930년대에 와서야 시작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하..이렇게 놀라울 수가! 신여성이라면 단발머리에 뾰족구두, 양장을 입고 멋내는 여성만을 생각했지,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힘쓰는 여성이었다니. 나는 신여성을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1920년대 한번, 해방 후 또 한번 불어닥친 노라 붐

신여성 못지 않게 조선의 지식인 남성도 불쌍하다는 것이 나혜석의 입장이었다.

‘조선의 유식 계급 남자 사회는 불쌍합니다. 제일 무대인 정치 방면에 길이 막히고, 배우고 쌓은 학문은 용도가 없어지고, 이 이론 저 이론 말해야 이해해 줄 사회가 못되고, 그나마 사랑에나 살아볼까 하나 가족제도에 얽매인 가정 몰이해한 처자로 하여 눈살이 찌푸려지고 생활이 신산스러울 뿐입니다.’

이런 구절을 보면 페미니즘이 남성을 몰아붙이기만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틀린 주장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인 노라의 이름을 딴 ‘노라붐’이 1920년대에 한번, 해방후 1946~1948년에 또 한번 두 번 있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는 위와 같이 조선 지식인 남성들이 정치로 나갈 길도 막히고 세상이 엉망이니 불령선인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고 여자들이 이해해줬지만, 해방 후에도 남자들이 이상을 위해 정치를 하고, 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이권 따내고 돈 해먹는 등 모리배처럼 굴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다시 노라붐이 불었던 것이다.

당시 노라와 함께 신여성들의 정신적 멘토가 된 이는 러시아 최초의 여자외교관 콜론타이다. 그녀는 ‘정조는 물과 같아서 새컵에 따르면 새 물이 된다’, ‘성욕을 채우는 건 물 한잔 마시는 것과 같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했고, 신여성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제2부인의 자리도 만족했다. 남녀 관계에선 사랑이 도덕이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는 것이 정조를 저버리는 것이지, 불륜이 도덕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1세대의 실패를 보고 여성성을 내면화한 2세대 여성작가들

그러나 이렇게 급진적으로 살았던 1세대 여성작가 나혜석, 김명순 등이 자식과의 연이 끊기고, 결국엔 행려병자로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2세대 여성작가들은 모성중시, 신여성 비판 쪽으로 기울었다. 강경애, 최정희, 백신행, 박화성, 지하련 등 2세대 여성작가들은 1세대의 패배를 지켜보며 여성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니 모성애 등 세상이 허락하는 가치를 내세우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가장 여류다운 여류작가로 칭송받았던 최정희가 또 한편으로는 가장 정치적인 작가로 군림했으니, 여성성이란 이용하기에 따라 반역일수도 권력일 수도 있다는 점이 놀랍다. 어떻게 보면 안타깝고,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요즘의 미투 운동 국면에서 <김연실전>의 모델이 된 작가 김명순을 ‘조선 최초의 미투’라고 소환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강사님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김명순을 ‘조선 최초의 미투’로 소환하는 자체가 그녀들을 스캔들로 소비했던 1930년대의 방식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그 의견에도 일견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음 시간에는 신여성의 나머지 반쪽인, 북으로 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겠다며 열띤 2시간의 강의가 끝났다.

 

이 2시간의 강의를 통해, 육아는 엄마 혼자 담당하는 게 전통이 아니며 기껏해야 100년밖에 안된 신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강사님의 “‘우리 엄마는 아이 낳고 바로 다음 날 밭매러 나갔어’가 가능한 이유는, 그때는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따로 있었거든요.”가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았다.

남자 청강생들이 뒤에 굳은 얼굴로 앉았길래, 토론시간에 난투극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토론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페미니즘을 배우러 온 건데, 내가 겉모습만 보고 지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페미니즘의 세계는 넓다. 역사를 훑어보면 지금이 가장 진보한 시대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만큼 과거에도 모든 것이 존재했다. 1920년대, 1930년대를 살았던 여성들이 2010년대의 끝트머리를 살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모험적이며, 자유로웠다.

이 강좌의 주교재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과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강의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