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이 울면 세상이 다 울지요”

 

단풍이 곱게 물든 강화도 우리마을 입구

 

여기 공기가 참 좋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여긴 먼지가 하얀데, 서울은 먼지가 까매요.

 

잠깐 둘러보았는데, 시설이 굉장히 좋네요. 선친에게 물려받은 땅을 기부해서 우리마을을 세운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원래 강화도 출신이십니까?

네, 제가 원래 여기 강화군 길상면 출신이에요. 지금은 집이 헐려 없어졌지만 이곳에서 자랐죠. 어머님의 교육열이 엄청 높으셔서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고(배제고, 연세대 신학과), 방학 때만 내려왔습니다.

 

김 촌장과 발달장애인들의 사진이 반겨주는 우리마을 사무실 입구

 

 

우리마을은 대한민국 최초의 ‘장애인 직업학교’

 

장애인 자활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 인생은, 제가 이걸 하고 싶다 해서 한 건 하나도 없어요. 다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밀어주고 당겨서 여기까지 왔지요. 주변에서 이걸 하는 게 좋겠다, 저걸 한 번 해보라,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하.

이 일(장애인 자활)도 영국에 있을 때 전임 주교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수원에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었는데, 다들 연장자라 나가고 맡아서 할 사람이 없으니 당신이 해 보라고.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수원에는 이미 이방자 여사(영친왕의 부인)가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발달장애인들의 초등학교라고 할 수 있는 성베드로학교를 서울에 열었지요. 지금 성공회대의 전신인 성미구엘 신학원에 작은 집을 빌려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성베드로학교 10년, 교구장 10년, 목회 10년 하고 은퇴한 뒤 강화도에 와서 우리마을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의정부에 집사람이 했던 장애인 유치원이 있었고, 성공회대 안에 초․중․고는 물론이고 전공과라고 해서 대학교까지 장애인 교육이 이루어졌어요. 요즘은 복지관이 잘 되어 있어 졸업 후에도 갈 데가 있지만, 그때는 장애인들이 졸업 후에 갈 데가 없었어요. 부모들도 애들이 졸업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구요.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직업학교를 만든 것이고, 그게 우리마을입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직업학교로는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처음이지요.

 

요즘은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요양원 건립을 위해 힘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해방 후 70년, 나라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교육은 나름 잘 해왔어요. 그런데 노인이 된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나 복지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우리마을 최고령자가 57살이에요. 베드로학교 다니던 친구들이 저와 함께 늙어가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나이 든 뒤에도 쉴 곳을 만들어 줘야합니다. 장애인 엄마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내가 우리 애들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기가 막힌 얘기거든요. 자기가 죽고 나면 어디 맡길 데가 없으니까요.

그런 장애인을 위한 양로원을 만들자고 했더니 정부에선 일반 양로원에 보내라고 해요. 발달장애인이 갑자기 정상인이랑 살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요. 격리된 생활을 하다가 나이 먹었다고 갑자기 같이 살아집니까?

우리는 경험으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청주에 ‘보나의집’이라는 발달장애인 시설이 있는데, 거기 있던 분들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일반 양로원에 데려다 생활을 시켰는데, 완전 물과 기름이었어요. 할머니들도 속상해 하고, 우리 친구들도 속상해 하고.

 

성베드로학교와 장애인들을 위한 요양원 건립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김 촌장

 

 

발달장애인을 위한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여생을 편하게 보낼 방법이 뭘까 궁리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땅이 아직 조금 남았으니까 내가 땅을 내놓고, 모금을 하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정부에선 장애인 양로원은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해야 되겠다”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장애인 양로원이 만들어지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발달장애인을 책임지는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이 최초로 생기는 겁니다. 그 일의 효시가 되는 것도 좋잖아요? 성공회가 작은 교단이지만 발달장애인을 위한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스템’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얘기는 작년에 처음 나왔고, 올해부터 본격 추진하고 있지요. 홍보물도 만드는 등 막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 앉아있기만 하고, 일은 거의 우리 원장(이대성 신부)님이 다하고 있어요. 하하.

버려진 사람 하나를 구원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버려진 사람 하나를 데려다가 제대로 된 노후를 맞이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건강한 사람이 60살부터 노인이라면, 발달장애인은 40살부터 노인이에요. 그만큼 장애인한테는 노쇠 현상이 일찍 옵니다. 우리마을에 와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세상이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는데, 한 가정이 골병들고 우울하고 눈물이 나면, 그 사회는 빵점이거든요. 다 같이 즐거워야지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이후로 모금이나 기부가 부쩍 줄었다고 하던데요?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빽으로 기업들 등쳐서 모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요. 어렵지 않습니까?

어렵다마다요. 최순실 사건도 있고, 대형 교회에서 모금을 해서 사기를 쳤다는 둥 좋지 않은 뉴스가 나오고. 게다가 경제도 안 좋아져서 모금이 정말 쉽지가 않네요. 우리 친구들도 노동자예요. 그러니까 일을 하고, 은퇴하면 쉴 수 있게 해주면 참 좋을 텐데…. 요양원이 꼭 만들어지도록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나 <다들>에서도 많이 도와주세요.

 

구순에 이른 늙은 성직자의 입에서 얘기가 끊임 없이 이어졌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간절함과 진실성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런 바람에 말을 중간에 끊기가 쉽지 않다. 인터뷰가 이렇게 진행되면 인터뷰어가 인터뷰이한테 지는 거다. 새로운 질문으로 말을 잘랐다.

 

콩나물을 기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콩나물 공장을 하거든요. 풀무원이 우리를 도와주는 고마운 기업이에요. 4~5년 전 협정을 맺어 우리 콩나물을 풀무원에서 다 사가요. 원래 우리 기계가 수동이었는데, 풀무원 사장님이 보더니 “기계를 자동으로 바꾸시지요” 하더라구. 돈이 없어 못한다고 했더니 “얼마나 듭니까?” 물어서 2억5천 정도 든다고 했더니 “우리가 의논을 좀 해보겠습니다” 하더니, “1억은 우리가 기부를 하겠습니다. 나머지 1억5천은 콩나물 팔리는 대로 얼마씩 갚으세요”라고 해요. 얼마나 고맙던지.

풀무원이 또 하나 고마운 건, 우리 신부님들이 가을이 되면 전라도, 제주도로 콩을 사러 갑니다. 그게 보기 딱했던지 그 풀무원 사장님이 “우리가 콩을 구해줄 테니 그걸 길러서 콩나물로 크면 우리에게 줘요. 그걸 팔아서 남는 이익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나요? 천사지요 천사. 그런 고마운 분들 덕분에 이렇게 먹고 삽니다. 하하.

 

 

공무원은 “왜 오셨어요?”가 아니라 무얼 도와드릴까요 물어야

 

콩나물 전에는 뭘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했지요. 18년 전에는 상추 수경재배도 하고, 버섯도 하고, 고추, 토마토도 기르고, 자잘한 거 안 해본 게 없어요. 그런데 상추를 기르면 곱게 따야 상품이 되는데, 장애인들은 훈련을 시켜도 따는 게 잘 안 돼요. 닭도 한번 길렀는데, 어느 날 가보니까 병아리가 왔다갔다 해요. 우리 친구들이 보이는 달걀을 가져오는 건 잘 하는데, 닭이 품고 있는 알은 가져오지 못한 거지요. 장애인들이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는 잘 하는데, 둘, 셋은 좀 느려요. 응용력이 부족한 겁니다. 손이 많이 갈수록 좋은 상품이 나오는데, 우리 친구들한테는 그게 한계가 있지요. 하지만 중복 교육을 하면 끈기 있게 잘 해요. 일반인들은 싫증을 잘 내는데, 그게 없거든요.

 

콩나물 공장을 둘러보며 질문하고 있는 김 원장

 

실패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많았군요?

예.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콩나물을 하게 된 거예요. 지금 콩나물 공장에 20여 명이 근무하는데, 그 중 5~6명은 한 달 월급 120만원을 가져갑니다. 부모들이 잘 모아두면 그 퇴직금으로 우리가 앞으로 세울 양로원에 가면 돼요. 이렇게 우리는 양로원을 위한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데, 나라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관공서에 가면 공무원들이 “왜 오셨어요?”가 아니라 “뭘 도와드릴까요?” 해야지요. 바쁘고 힘들겠지만 말부터 좀 바뀌면 좋겠어요. 이런 거 보면 우리 세상이 모두가 함께 변해야지, 어느 한 구석만 변해서는 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 듣고 보니까 상당히 절박한 문제네요? 

그렇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양로원, 이거 내일이면 늦습니다. 오늘 당장 양로원을 위해 법을 만들고, 있는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발달장애인들이 어릴 적에 교육받듯이, 우리 공장에서 안심하고 일을 하듯이, 나이 들어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해요.

 

 

학생들이 졸업식에 안 온 눈물겨운 이유를 아시나요?

 

내가 우리마을을 만든 것도, 베드로학교 졸업식 때 애들이 졸업장을 주는데, 호명해도 안 나오는 거야. 졸업장을 받으면 내일부턴 학교에 나올 수가 없으니까. 그걸 애들이 아는 거지. 그 딱한 사정을 우리도 보고, 부모도 봤지요. 그래서 이 마을을 만들게 된 거예요.

장애인 담당 공무원이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우리 시설 같은 곳에 와서 하루쯤 숙박하면서 실체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실체험을 해야 피부로 느껴서 제대로 알지, 책상에 앉아 기안만 해서는 모르거든요. 이게 실제로 되는 일인지 아닌지, 되려면 사람은 얼마나 필요하고 돈은 얼마나 드는지…. 두 쪽이 손뼉 소리가 나도록 맞아나가면 정말 좋겠어요.

근년에도 우리 대통령이 복지 이야기를 하면서 장애인과 함께 나가자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 안에 노인 장애인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장애인을 위한 교육도 잘 해왔고, 복지시설도 많이 만들어놨는데, 이 사람들도 이제 60~70살이 됐단 말이에요. 이 사람들이 갈 곳이 필요해 진 것입니다. 이러니 요양원을 만들면 장애인 부모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현재 (일반) 독거노인 문제도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거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요? 이 사람들 마음이 아프면 세상이 다 아픈 겁니다. 그래서 교회나 부처님이나 종교가 좋은 거 같아요. 소외된 사람들에게 손 뻗어서 도우니까.

 

 

하나님은 쓸모없는 사람을 세상에 내놓지 않아

 

우리마을에는 몇 분이나 있습니까?

시몬의집, 요셉의집, 요한의집, 마리아주간보호센터 네 군데를 합쳐서 ‘우리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제 세례명을 딴 시몬의집에는 직업재활학교와 기숙사가 있고, 여기서 5~6분 가면 있는 요셉의 집은 고아와 부모, 장애인이 함께 사는 그룹홈이 있구요. 요한의집은 거주시설이고, 마리아 주간보호센터는 중증장애인을 낮 동안 돌봐주는 시설입니다. 네 군데 전체에 모두 90여 명이 살고 있지요. 그 중 20여 명이 콩나물 공장에서 일을 하고, 29명이 전기부품 조립을 합니다.

장애인에게 일감만큼 소중한 게 없습니다. 전기부품 하나 조립하면 7원을 받아요. 정말 적은 돈이라도 꾸준히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걸로 “나는 밥벌이를 하고 산다”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오른손이 마비된 사람이 있는데, 왼손으로 정확하게 조립을 잘 해요. 상자에 담을 때는 10개씩 잡아서 담는데, 한 손에 잡으면 딱 10개고, 어디가 잘못 조립됐는지 바로 알아요. 콩나물도 한 손에 딱 잡으면 300g으로 숙달된 사람이 많지요. 거의 기계 같은 숙련도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정확한 사람들이 없어요. 이렇게 정확하고 훌륭한 친구들을 왜 낭비합니까?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왜 이 사람들은 일거리에서도 빼놓느냐는 것입니다. GNP 3만불 시대다, 뭐다 하는데, 이 사람들도 같이 일하면 GNP가 3만불 5전, 10전이 되잖아요?

하나님은 결코 쓸모없는 사람을 세상에 내놓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도, 버릴 게 없고 쓸모 없는 게 없다, 세상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이런 얘기를, 이런 일을 하다보면 안 할 수가 없어요.

 

 

방법만 다를 뿐, 장애인에게도 학습은 필수

 

저희가 하는 일이 평생학습이어서 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장애인들에게도 학습이나 공부가 필요하지요?

물론이지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이 친구들에게도 학습이나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40년 전 성베드로학교 시절, 아이들을 데리고 짜장면 먹으러 가요. 다 먹고 내가 돈 내러 가면 주인이 “신부님이 오셔서 고맙지만, 다음에는 오지 마세요”, 이럽니다. 아이들이 엉망진창으로 먹어대니까. 근데 요즘은 자주 다니고, 습관도 아니까 이 친구들이 아주 점잖아요. “조용히 먹읍시다” 하면 조용히 잘 먹어요. 그러니까 역시 교육이 필요한 겁니다. 특히 단순 작업에 대한 중복 교육은 큰 효과가 있어요. 싫증 안 내고 끈기 있게 잘 하지요.

 

일이 끝난 뒤에 체계적인 학습이나 교육을 따로 시키나요?

예전에는 일을 끝내고 나면 할 일이 없었는데, 원장(이대성 신부)이 오고난 뒤 이러면 안 되겠다 하면서 바꿨어요. 오전에 일을 끝내고 나면, 오후에 여기 선생님들과 함께 소풍도 가고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북도 두드려요.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장애인이다 보니 글을 읽거나 강사의 강의를 듣는 교육엔 좀 약해요. 그 대신 여가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를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선생님들이 오셔야 되고, 예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요. 예산이 없으니까 서울의 전공 선생님들이 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참 안타깝지요. 24시간을 이 사람들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달달 볶는 그런 사회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들이 “아, 나도 사람 대접을 받고 사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되지요.

 

 

잘 나누어 쓰면 고루고루 쓸 수 있는 게 ‘돈’

 

장애인이어서 더욱 학습과 공부가 필요한데, 현실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마음은 굴뚝 같은데… 기숙사에는 간호사도 있어야 되고, 특수교육을 전공하거나 언어치료를 하는 선생님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선생님이 없어요. 예산이 모자라기 때문에. 여기는 선생님 한 명이 장애인 여덟 명을 돌봐요. 우리 원장 신부가 영국에 다녀왔는데, 거기는 여덟 명의 아이들을 스무 명의 선생님이 돌본다고 해요. 선생님한테 쓰는 예산이 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저녁 먹으러 나가자” 하면 여덟 명이 다 나가야 돼. 영국은 저녁 안 먹고 남겠다는 아이한테 선생님이 붙고, 저녁 대신 영화보고 싶어 하는 아이한테도 선생님이 붙어요. 근데 우리는 단체생활을 해야 되고, 통일을 해야 됩니다. 돌봐줄 선생님이 없으니까. 이것도 얼마나 잘못 된 겁니까?

돈은 잘 나눠 쓰면 고루고루 쓸 수 있어요. 나라에서 월급 액수를 올려놓으니, 중소기업이 감당을 못하고, 우리 같은 데는 더군다나 돈이 없어 선생님을 못 쓰고. 여기서도 얼마 전에 선생님이 퇴직을 했어요. 서울이라면 금방 충원이 될 텐데, 여기는 면담해서 오기로 해놓고도 못오겠다고 연락이 와요. 멀기도 하고 대우도 그러니까. 서울과 시골의 대우가 같아서는 안 되잖아요? 서울보다 월급을 더 높여주면 올 거란 말이에요. 예를 들어 버스타고 올 거, 돈을 더 주면 세 명이 돈을 모아 차를 사서 몰고 출퇴근 할 수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이런 얘기를 관에 하지만 듣지를 않아요. 마음이 있어야 되지, 마음이 없으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들뜬 표정으로 무언가 한창 의욕적인 얘기를 펼치던 김 촌장의 얼굴이 우울한 빛으로 변한다. ‘현실의 벽’으로 화제가 돌아가자 말씨도 가늘어진다. 다시 화제를 돌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독재정권의 감시를 뚫고 ‘6·10 국민대회’가 열린 곳이 촌장님이 주교로 계셨던 덕수궁 옆 성공회 대성당이었습니다. 이날 국민대회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큰 분수령이 되었고, 대회가 열리고 국민선언이 선포된 성공회 대성당은 일약 ‘민주화의 성지’로 우뚝 서게 됐습니다. 국민대회의 성공회 대성당 유치는 미리 계획했던 일인가요? 주교님은 알고 계셨지요?(웃음)

6·10 국민대회를 성공회 대성당에서 한다는 정보가 사전에 새나갔어요. 그래서 6월 초부터 경찰이 대성당을 봉쇄했지. 그랬더니 약삭빠른 신부님 한 사람이 5월 중순쯤 박형규 목사 등 재야 인사 여러 분을 미리 모시고 대성당 안에 들어왔어요. 대성당이 봉쇄되고 나서부터는 대성당 뒤켠에 있는 수녀원쪽 담을 넘어 들어오기도 했구요. 신부님이 미리 이런 분들을 성당 안에 모셔다 놓고는 “주교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더니, “국민대회를 해야겠어서 주교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제가 데려왔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내쫓아요? 그래 내가 “잘 했어요. 그냥 합시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박형규 목사가 6월 10일 12시에 성당 꼭대기에 올라가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모여 있던 재야 인사 분들하고 미사도 같이 보고. 생각해 보면 그때도 나는 주교니까 거기 있었던 거고, 떠밀려서 한 거지, 내가 뭘 한 거 아니에요. 다른 신부님이나 교수님이나 재야 인사 분들에 비하면 한 게 없는데, 자꾸 내 이름을 내는 거야. 그래서 여러 차례 “내 이름 내지 마세요”, 그랬는데도 자꾸 이름 내니까 속상해요.

 

 

조그맣고 아름답게, 나누고 봉사하는 교회가 더 많아져야

 

성공회는 1534년 로마 가톨릭에서 떨어져나간 영국 국교회에서 시작됐다.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에 대한 견해 차로 독립했으니, 로마 가톨릭 신부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지만 성공회에선 결혼이 가능하다. 김성수 주교도 결혼해 자녀를 둘 두고 있다.

성공회는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전통과 이성을 존중하며, 배타성보다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한다. 세계적으로 1억 명의 신자가 있고, 한국에는 150여 개의 교회, 5만 명의 신자가 있다.

 

한국에서 성공회는 교세가 상대적으로 아주 작습니다. 

얼마 안 되지요. 어떤 양반이 성공회 신자가 몇 명이냐 물어서 “5~6만 명”이다 했더니 “신부님, 3년 전에도 5~6만 명이라면서요?” 해요. 하하.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데는 한 교회 신자 수가 그 보다 많은데요?(웃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크지요. 그렇게 하시는 목사님은 정말 훌륭해요. 훌륭하다고 안 할 수가 없어. 욕심 같아서는 그렇게 훌륭한 걸 장애인을 위해 힘을 써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나라가 얼마나 좋게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요.

대한성공회가 125년 됐어요. 그런데 이제 설립한 지 50~60년 밖에 안 되는 교회도 신도수가 5~6만 명이 넘지요. 그런데 그런 교회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나님한테 십일조 바치는 것도 중요하고,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정의와 평화와 나눔이 소중하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뭐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했듯이, 나도 세상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 나눔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살면 아주 아름답고 깨끗한 나라가 될 것이고, 천당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난해, 민세상을 수상한 뒤 진행하신 인터뷰를 보니까 인터뷰 말미에 촌장님이 기자에게 “이 말을 꼭 넣어달라”면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더군요.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꿈을 가졌다. 늙고 나서 보니 나는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한테도 아주 조용한 울림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 지하실에는 왕족, 귀족의 무덤이 있어요. 거기 묘비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교가 되면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죽을 때가 되어 생각하니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 남이 먼저 변하길 바란 게 큰 잘못이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했다.” 저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꼭 써달라고 했지.

이 묘비명 말처럼 교회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잘 하는 데도 있지만 아닌 데도 많아요. 대형 교회가 몇 년 갈까요? 영국 대형교회에 교인이 없어서 도서관도 되고 그런 걸 보면, 크게 하는 것도 좋지만, 조그맣고 아름답게, 나누고 봉사하는 교회가 많이 생기면 그게 교인들이 바라는 천당이 아닌가, 생각하지요.

 

인터뷰팀이 건넨 스케치북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김 촌장은 “함께 일하고 행복을 나누는 우리마을”이라고 적었다. ‘촌장’이라고 써 있는 모자가 눈길을 끈다.

 

 

직업자활이 가능한 시몬의 집

 

1시간이 넘는 인터뷰가 끝났다. 김 촌장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마을 견학을 재촉한다. 그러지 않아도 울긋불긋한 단풍과 낙옆에 조용히 덮여가는 이 작지만 아담한 마을을 둘러보고 싶었던 터였다.

 

우리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는 길
우리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며 기념 사진을 찍은 두 사람

 

‘우리마을’, 즉 ‘시몬의집’은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했다. 정원과 놀이터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빙 돌아가는 구조인데, 1층에는 남녀 각각 4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 2명씩 생활한다. 방과 방 사이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있다. 기숙사를 지었을 때가 20년 전. 인덕션이 대중화되기 전에 장애인의 안전을 위해 인덕션을 설치했을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했다.

직업학교에서 기숙사는 의무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베드로학교 졸업생들이 기거할 곳이 필요해 기숙사를 지었다. 기숙사 한 달 이용료는 50만원. 연간 2천만원의 적자가 나지만, 콩나물사업 수익금과 300여 후원 회원들의 성금으로 충당한다.

2층으로 올라가니 복도 천장의 서까래를 한옥식으로 고풍스럽게 펼쳐 놓은 게 눈에 띈다. 이 곳에 전기부품 조립 작업장이 있다. 29명의 발달장애인들이 오전 9시40분부터 일을 시작해 하루 2시간씩 두꺼비집에 들어갈 부품을 조립한다. 모두 4개의 테이블에 7~8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라디오를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 이들이 작업하는 양은 한 달에 300~500개이고, 액수로는 2~3만원이다. 수익을 내지는 못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꾸준히 일을 맡겨주는 게 큰 의미가 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달 34만원의 급여를 타간다. 콩나물 사업에서 나는 수익으로 이들의 급여를 충당한다.

 

시몬의집 기숙사 입구
장애인들의 여가 시간을 위한 당구대도 있다.
어머니의 품처럼 둥글게 지은 우리마을 안마당에 가을 햇살이 들고 있다.

시몬의집을 나와 콩나물 작업장으로 가는 길에 돌담이 아름답다. 이 건물을 짓느라 땅을 고를 때 나왔던 돌을 버리는 대신 담장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콩나물 사업장에는 자동 기계 한 대와 수동식 포장대가 있다. 직원들은 6시간 근로자와 4시간 근로자로 나뉜다. 처음에는 12~15명으로 시작해 수익이 날 때마다 1명씩 더 고용해 지금은 22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든 콩나물(풀무원 옛맛 유기농 콩나물)을 한 봉지 받아왔는데, 다듬을 것도 없이 깨끗하고 맛있었다.

 

김 촌장이 콩나물 포장 작업 중인 우리마을 식구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몬의집 1층 작은 예배당에서 장애인 요양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홍보 동영상을 봤다. 4줄의 벤치가 놓여 있는 예배당은 많아야 한 번에 30명쯤이 예배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작지만 아름답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이전에는 여기서 미사를 봤지만 지금은 인원이 많아져 식당에서 본다고 한다.

 

우리마을의 작은 예배당. 한 번에 30명쯤 예배를 볼 수 있는, 작지만 아름답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요양원에 기부하려면, 060-700-1255로 전화를 걸면 된다. 1통화에 1만원을 기부할 수 있다.

 

24시간 편안한 거주시설, 요한의집

 

시몬의집을 견학한 뒤 일행은 차로 5~6분 정도 떨어진 요한의집으로 갔다. 요한의집 옆에는 마리아 주간보호센터와 요셉의집(그룹홈)이 있다.

 

요한의집은 이름 그대로 ‘집’이라서 간판을 걸지 않았다.
식당
중앙 강당
1층 복도

 

요한의집은 발달장애인 거주시설이다. 일반 장애인 거주시설 앞에 크게 ‘00의 집’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곤 하는데, 요한의집에는 큰 현판이 없다. 일반인들의 집에 큰 현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30명이 함께 사는데, 우리마을 작업장에서 일하는 분들(6명)은 출퇴근을 하고, 중증장애인들은 낮에 마리아 주간보호센터에 있다가 온다.

햇볕이 잘 들어오는 중앙 강당을 비롯해 1층에는 헬스실, 원장실, 직원실, 식당 등이 있고, 2층에 여성들이, 3층에 남성들이 살고 있다. 한 방에 2명씩, 4개의 방이 한 집으로 구성되어 모두 30명이 살고 있다. 한 집에는 3명의 선생님이 배정되어 있다.

요한의집 이정우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도 장애인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짜는데, 강사 섭외가 힘듭니다. 일반인을 가르치던 분들은, 장애인들이 1년을 가르쳐도 나아지지 않으니까 그 부분을 참 힘들어 하시더라구요. 성과가 없어도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일일 터인데요….”

인터뷰와 견학을 모두 마치고 물신주의와 이기주의로 찌든 도회지로 다시 돌아가는 길. 차창 밖 들녘에 대낮 햇빛에 반사된 누런 가을이 평화롭고 풍요롭게 내려앉아 있었다.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회개합니다”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너도 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목소리를 낸다.

“회개합니다.”

강화대교를 건너며 가슴 속에 문득 작은 깨달음, 소각(小覺)이 일었다.

“저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 세상은 살 만한 것이었구나.”

 

 

김성수는 누구인가?

1930년 6월 12일 강화도 길상면의 한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4년 서른네 살 늦은 나이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973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민국 최초의 지적장애인 특수학교 인 성 베드로학교를 만들고 교장으로 일했다.

1984년 주교 서품을 받았다. 1987년 성공회 서울교구장 시절, 정동 성공회 서울주교좌 대성당에서 ‘4·13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 집전을 시작으로 그해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하며 우리 사회 민주화를 앞장서 이끌었다.

1990년 대주교 서품을 받은 뒤 1993년~1995년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 2000년~2008년 성공회대 총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푸르메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1999년에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강화도 땅에 지적장애인 직업재활공동체 ‘우리마을’을 설립한 뒤 지금까지 ‘촌장’으로 지적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아산상 특별상, 인촌상, 만해대상(평화 부문), 민세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교회의 역사>라는 책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