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배 인생을 살아온 기계 기술자 대도ENG 정영계 명장

기술자는 과학자, 공부 못하면 기술자 못돼

정영계 명장은 스스로를 ‘2배 인생’이라고 부른다. 남들보다 경력이 10~12년 정도 많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회사 다니면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으니 7년 정도가 세이브 되었고, 병역특례로 일했으니 군대까지 5년 정도가 세이브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2배 인생이 시작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광주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겨울방학 때 서울로 올라가 삼촌이 근무했던 중앙직업훈련원에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 간혹 “공부 못하면 기술이나 배워라, 농사나 지어라”는 말을 하는데, 정명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공부를 못하면 기술도 못배우고, 농사도 못짓습니다. 삼각함수를 모르면 기계를 만들 수 없어요. 공학자와 기술자는 과학자입니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중앙직훈을 나와 취직한 뒤에도 기계조립 기능사 1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공구함에 책을 얹고 공부했다. 당시 1급을 따려면 중학교 졸업자는 경력 13년이 필요했고, 2급을 딴 사람은 6년 뒤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운좋게도 76년 국가기술자격법 체제를 정비하느라 74년 한 해에만 학력, 경력 제한이 없어졌다. 정명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기회가 왔어도 자신이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자격증을 딸 수 없었을 거라며.

자격증을 딴 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공고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추천서 써주는 회사로 옮겨 서울공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 나이 21살. 담임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한편으로는 회사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마쓰시다와 제휴한 회사에서 직원들을 상대로 일본어 강좌를 열었는데, 생산직에서는 딱 2명이 왔고, 그 중 한 명이 정영계 명장이다. 이때 배운 일본어는 20여년 뒤 창업을 하고 일본과의 거래를 할 때 도움이 되었다. 역시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신입의 마음으로 배운 기술

정명장이 서울공고를 졸업할 즈음, 공고 졸업생들을 사우디로 파견하라는 정부시책이 내려왔다. 파견하면서 병역특례도 가능하다기에 신청하려 했더니 회사에선 안된다고 했다. 결국 대림산업으로 이직해서 사우디에 갔다. 그곳에서 건설 자재 관련 일을 했지만 재미가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와 26세에 창원에서 직업훈련원 교사가 된다. 기능사 1급 자격증이 있었기에 월급도 많았다. 직훈교사 생활을 계속했으면 편하게 살았겠지만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직훈 교사라면서 실무도 잘 모른다는 생각에 32살 때 금형공장에 신입으로 들어갔다. 월급도 깎여, 어린 직원들이 반말하며 하대해, 속앓이를 많이 했지만 3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과장이 되었다. 처음엔 자신이 깎아온 금형을 집어던지며 “이건 못써요”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다 인정해주는 기술자가 되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지는 정직함으로 따낸 일본 수주

그러다 사장님이 교통사고가 나서 회사 운영이 어려워졌고, 다시 취업하기에 나이가 많았던 정명장은 기계 한 대를 가지고 창업하게 된다. 그게 바로 대도ENG.

“금형 기술은 가늘고 깊어요. 시작할 때는 쉽지만 알수록 어렵죠. 0.2mm 짜리 뚜껑을 깎아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이건 너무 얇아서 열에 의한 팽창으로 변형이 와서 타버리거든요.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보름 동안 꿈속에서도 일을 했어요. 결국 안에다가 동으로 만든 봉을 집어넣어 해결했습니다. 다 해결하고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생각해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고통스럽게 열심히 생각해냅니다.”

한국에서 깎기 힘든 기계들은 다 자신에게 왔다고 회고할만큼 기술에 있어선 자신 있었다. 그러나 자만하지 않고 정직했다. 홀 2개 간의 정밀도를 10미크론에 맞춰달라는 일본 업체가 있었는데, 50%는 가능하지만 100%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일본 측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데도 무조건 일을 받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기에 정명장의 정직한 태도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 바이어가 500만엔 어치의 일을 주겠다고 했을 때도 정명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100만엔 어치”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수량으로 시작한 것이다. 1990년 100만엔부터 시작한 거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에 바탕

그간 정명장은 도요타, 덴소 등의 일본 기업과만 거래했다. 왜 한국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는지 물었더니, 한국 대기업들은 하청업체에 와 보지도 않을뿐더러, 설비와 인원 등 요구조건이 까다로운데 비해, 일본 기업은 직접 와서 보고, 일만 제대로 해주면 전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청업체라는 말대신 협력업체라는 말을 쓴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한국의 기업문화는 하청에 머물러있고, 일본과의 거래를 통해 진정한 ‘협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오래 납품하던 회사의 사장님이 돌아가시고도 사모님이 아직도 정명장을 가족처럼 여겨 손편지를 보내거나 카드를 보내 챙긴다고 한다. 사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형성되어야 가능하다.

 

열정의 생활화가 중요

정명장은 세브란스병원 김용욱 박사와 함께 안면골교정기도 개발했다. 선배의 소개로 처음 김용욱 박사를 만났을 때, 기계 쪽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혹시 공고 나와서 의대 들어간 거냐 물었을 정도였다. 그건 아니었고 혼자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기계 쪽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게 된 거라고 했다. 그 열정에 매료되어 7년 동안 공동 개발했다.

일본 영업인들 역시 기계를 무척 잘 아는데, 물어보면 공대를 나온 게 아니라 영업을 하기 위해 혼자 열심히 공부한 결과라고 한다.

정명장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회사 직원들에게도 “사장이 월급을 주는 게 아니다. 니가 벌어서 니가 가져가는 것이다.”는 말로 주인의식을 강조한다.

열심히 하는 태도, 즉 열정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열정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정명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열정, 노력, 그리고 생활화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