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 사회적 장애를 버리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가난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태어난다. 또 어떤 이는 중국의 서안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고, 어떤 이는 뉴욕의 흑인 가정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태어날 수 있다. 그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며, 양성애자일 수도 있다. 장애(障礙)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처음부터 건강하게 태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편할 수도 있고,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장애를 입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삶을 처음부터 선택할 수 있었다면, 누가 굳이 가난한 삶을, 고된 삶을, 불리한 몸으로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겠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해진 상황의 인간’을 가리켜 ‘피투적(던져진) 존재’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되묻는다. 내가 고르지도 않은 이 삶을 굳이 힘들여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하자면, 나만이 그 삶의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게 주어진 삶은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내게 주어진 삶과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삶은 이 세상 단 하나, 단 한 번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시공(時空)이다. 보석이 귀한 것은 그것이 지닌 희소성 때문이듯이 우리가 지닌 이 삶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므로 소중하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힘겨운 사람, 남자, 여자, 몸이 건강한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 이 모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의 주인들, 그들 중 누가 더 귀하며, 누가 더 천한가.

 

장애인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장애인은 단순히 몸에 손상을 입은 사람이 아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 중간에 빨간 테를 두른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람이 장애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보다는 몸에 손상을 입어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는(able) 것을 할 수 없는(disable)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장애인이다. 장애인이란 다시 말해, 자동차 사고로 허리를 다쳐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사고로 허리를 다쳐 계단만 있는 이 층의 미용실을 이용할 수 없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만약 그 건물에 승강기가 있다면, 허리를 다쳐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층의 미용실을 이용해 머리손질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다행히 승강기가 있어 미용실까지는 올라갔으나, 미용사가 이 사람을 보고 다른 곳엘 가보라고 거절한다면 여전히 머리손질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 WHO에서는 손상(impairments)으로 인해 같은 사회에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거나 아예 누리지 못하게 된 사람을 장애인(person with disabilities)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들은 학교를 가고 싶어도, 회사에 가고 싶어도, 버스를 타고 싶어도, 영화를 보고 싶어도, 투표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학교나 회사, 버스, 영화관, 투표장이 이들이 이용하기엔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편을 무릅쓰고 이용하려 해도 이번엔 그러한 행위를 바라보는 주변의 특별한 시선들을 이겨내기 힘들다. WHO는 이렇게 교육이나 직업, 교통, 여가, 정치적 참여 등 당연한 삶의 욕구와 활동들을 가로막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무능력 상태에 빠뜨리는 사회 구조와 시민들의 인식을 특별히 ‘사회적 장애’(handicap, barrier)라고 명명하였다.

 

 

안타깝게도 손상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사고로 끊어진 척수를 다시 이어주는 의술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손상을 가진 개인이 행복해지는 것은 ‘무능력한 인간’(장애인)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그 사회가 먼저 손을 내밀어 자신의 장애(핸디캡)를 없애겠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장벽을 철거해 갈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장애의 주체가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최근 평생교육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들이 평생교육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의 수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애인은 만 명 중 겨우 두 명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세월을 지내오며 장애인들은 “우리도 평생교육을 받고 싶다.”고 사회를 향해 끝없이 외쳤고 삭발과 눈물로 호소하였다. 마침내 이 년 전 5월 국회에서는 장애인의 오랜 숙원을 담은 「평생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2017년 10월 14일 ‘개정 「평생교육법」 시행에 따른 장애인평생교육시설의 대응과 변화’를 주제로 열린 제4회 한국장애인평생교육복지학회 학술대회

그러자 올 2월 정부는 장애인의 평생교육추진체계 확립 등을 목표로 담은 ‘제4차 평생교육진흥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국가장애인평생교육진흥센터’를 설치하고 곧바로 ‘장애인 평생교육 실태조사’를 시작하였다. 대전에서, 서울에서, 제주에서, 또 다른 지역들에서도 새로운 학습자를 평생교육에 참여시킬 방안 마련에 분주하다. 이 땅의 평생교육이 오랜 사회적 장애의 빗장을 풀고 장애인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학습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5월 28일 국가장애인평생교육진흥센터 개소식

장애인 학습자들은 여느 학습자들과 다르지 않다. 현재 전국에 있는 사천여 개의 평생교육 시설을 함께 이용하고, 또 그 시설들에서 운영되고 있는 이십만 개의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간혹 문턱이 높은 곳이 있으면 휠체어가 드나들 만큼 턱을 낮추고, 화장실 이용이 불편하다면 좀 고치기만 하면 된다. 또한 시각장애를 가진 학습자들이 희망하면 강의 자료를 확대하거나 문서자료를 파일로 제공해 주면 된다. 청각장애를 가진 학습자들은 개인에 따라 수화통역이 필요할 수도 있고 문자통역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 도움은 조금만 신경 쓰면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나의 삶이 소중하듯 타인의 삶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사회적 장애의 주체는 바로 우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