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따라준다면

 

도시 전체가 배움의 터전이 되고 시민 모두가 더불어 배우는 도시,
삶과 배움의 경계가 없는 서울은 학교입니다.
학습하는 시민, 성장하는 도시를 위해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이 함께합니다.

<다들>이 서울은 학교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매월 서울자유시민대학, 모두의학교, 동네배움터 소식을 전합니다.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이 운영하는 각양각색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재미난 이야기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보람님, 독산고등학교에서 대안학급을 운영한다고 하는데 함께 해보지 않을래요?”

이미 대안학교와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험이 있어 학교에 소속된 아이들은 더 수월할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에 혜영님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독산고등학교, 금천교육복지센터와 함께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지며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으로 이견을 좁혔고, ‘꽃할배 학교’를 통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낸 경험이 있는 ‘사이님’을 섭외하게 되었다.

공부에 관심은 없는데 졸업을 하려니 학교에는 나가야 하고, 학교에 왔으니 수업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잠을 자거나 멍 때리는 것 외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노래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기대감에 부풀었다.

일주일에 두 시간, 5주간 진행되는 짧은 프로그램이라 거창한 성과를 내기보다는 제한된 시간 안에 아이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이 사이님과 나의 소소한 목표였다.

 

첫째 날, 무려 열두 명의 아이들이 왔다!

고등학생이니까 존대를 해야 하나, 반말을 해야 하나, 초면에 반말하면 하대한다고 생각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존대하면 가뜩이나 세대 차이 나는 나를 더 멀게 느끼지 않을까?

백팔번뇌 끝에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아이들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말을 걸었던 첫 만남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뻘쭘 그 자체.

우리는 자기소개로 수업을 시작했고, 실패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삶에 대한 책을 함께 읽었다. 그것이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기소개는 “저는 ㅇㅇㅇ입니다.”로 끝나버려 열두 명의 자기소개를 모두 듣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책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 잠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수업은 사이님과 나의 완패였다.

 

둘째 날, 지난 수업 때 느꼈던 당혹감을 만회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 너희들이 수업 때 엎드려 자겠다면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엎드릴 책상은 잠시 접어둔다!
  • 너희들이 수업 때 잠이 온다면 책상 대신 더 편하게 잠들 수 있는 접이식 침대를 마련할게. 잠은 침대에서 자라!!
  •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들을 위한 수업 공간을 준비하지는 않을게. 수업은 우리 모두의 것이니 공간을 만드는 책상과 의자 준비부터 함께 하자!!
  • 너희들이 말을 하지 않겠다면 굳이 해달라고 조르지는 않을게. 발표에 자신이 없을 수도,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일 수도 있으니까. 대신 손짓은 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날의 감정을 표현하는 감정카드는 세 장씩 골라다오. (제발)
  • 꿈이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추상적인 질문에 답해보라고 다그치지 않을게. 다만 하루에 작은 성취 하나쯤은 이뤄보자.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답하기 어렵다면 그보다 더 소소한 질문들에 답하는 연습을 하자.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이 먹고 싶은 간식은 스스로 생각해서 골라봐. 좋아하는 간식을 고르며 나는 왜 불닭볶음면이 좋은지, 친구들은 왜 불닭볶음면보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

 

먼저, 침대를 차지할 두 사람을 사다리 타기로 뽑았고,

<사다리 타기에 초집중하고 있는 아이들: 꼭 침대에 누워 수업을 듣겠다!>

 

수업을 진행하는 사이님과 음악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작은 공연을 마련했고,

<SNS에 올리겠다고 사이님의 공연을 녹화하고 있는 아이들: 팬심으로 대동단결>

 

감정카드로 소통을 시작했다.

 

피스모모(PEACEMOMO)의 자기표현카드

 

두 번째 수업은 아이들과의 첫 만남보다 훨씬 편해졌고, 이후 사이님과 나는 아이들이 잠을 자더라도, 질문에 답을 하지 않더라도, 음악에 흥미를 보이지 않더라도 닦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급함을 버리는 연습을 시작했다.

 

셋째 날, 노래를 만들기 위해 ‘만약에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을 살 거예요! 여행을 떠날 거예요! 학교를 그만둘 거예요!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생각이지만 좋아하는 음악이 있냐는 질문에조차 답을 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서 나온 대답이라 기특하게만 느껴졌다.

<사이님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아이들과 사이님만의 수업: 교실 밖에서 도촬>

 

넷째 날, 사이님이 아이들의 대답을 재구성해 <운이 따라준다면>이라는 제목의 곡을 완성해오셨다.

사이님은 내용이 새롭지는 않다고 계속 자책하셨지만, 일주일 만에 만든 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을 쏙 빼닮은 노래였다.

 

다섯째 날, 발표회를 위한 노래 연습에 앞서 사이님이 아이들에게 길쭉한 호루라기처럼 생긴 카주라는 악기를 선물하셨다.

카주는 노래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몇몇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고, 큰 소리를 내는 신기한 악기는 금새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발표회 리허설을 위해 여러가지홀 무대에 모여 앉은 아이들>

 

마지막 발표회 날, 모두의학교 여러가지홀에 동네 어르신들과 아이들, 독산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모였다.

자신들을 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관객들을 보자 연습할 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카주를 연주하던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렇게 많은 분이 올 줄 몰랐어요. 저희 정말 좋은 사람이 될게요.”

 

 

아이들은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갔다.

파티시에 수업에서 디저트를 만들게 되면 모두의학교에 가져오겠다는 아이, 한 시간 동안 새로 진학할 직업학교에 대해 설명했던 아이, 매주 여자친구에게 안개꽃을 사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아이, 겨울 방학 때는 공부를 하겠다는 아이, 게임 기획자가 되기 위해 특성화고에 진학하겠다는 아이, 여자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아이, 노래가 좋아 실용음악과에서 보컬을 전공한다는 아이.

앞으로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 가고자 하는 길에 운이 따라주기를!

 

 

 

<운이 따라준다면 – 독산고등학교와 사이>

만약에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십억이나 이십억? 아니 그냥 백억이라고 치자

옷 사고 차 사고 집 사고 평생 먹고살 수 있게 빌딩도 사야지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자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또 여기저기

무인도를 사고, 카페를 차리고, 사업, 주식, 도박, 사채놀이까지 하다 보면

금방 거지가 될 테니까 가족들한테도 조금은 남겨줘야지

너무 뻔한 게 아니냐고? 인생은 원래 뻔한 거잖아

우린 아직 어리고 미래는 아무도 모르지

로또에 당첨이 되진 않겠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운이 따라주기를

 

 

 

2018년 12월. 모두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