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끝없이 진실에 다가가는 일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86) 고려대 명예교수는 ‘전문 독자와 시민 독자를 동시에 거느린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평가(연세대 김호기 교수)를 받고 있다. 역사책이라면 어렵고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무너뜨린 <고쳐 쓴 한국 현대사>(1994년, 도서출판 창비)는 52쇄를 찍은 베스트셀러다. 작년 연말 창비에서 나온 강만길 저작집 총서는 무려 18권이다.

 

강 교수는 요즘은 제법 많이 쓰이고 있는 ‘분단시대’라는 용어를 한국사 시대구분에 처음 적용한 장본인이다. 이 용어로 그는 해방 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를 역사의 한 토막으로 객관화시키면서, 분단은 영속적인 상태가 아니라 언젠가는 극복되고야 말 ‘역사 속의 한 시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서 정년 퇴임한 뒤 상지대 총장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장을 지내다 10여 년 전부터 동해 바다가 눈앞에 내려다 보이는 강원도 양양의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남북관계의 극적인 전환이 기대되고 있는 2019년을 맞아 <분단시대 역사인식>의 주인공인 강만길 교수에게 분단 극복의 지혜와 평생 공부의 자세를 묻기 위해 양양을 찾았다.

 

인터뷰팀이 서울-양양 고속도로 양양 IC 근처 바닷가와 인접한 강 교수의 아파트를 찾은 건 1월 24일 오전 11시쯤이었다. 오랜만의 겨울철다운 추운 날씨였지만, 며칠째 전국에 걸쳐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가 말끔히 사라진 바닷가의 공기는 달게 느껴졌다. 강 교수와의 인터뷰는 철지난 하조대 바닷가 근처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한 카페에서 12시30분쯤까지 1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홍보대외협력팀의 황미연 팀장과 전아림·조한준 주임, <다들> 이유정 기자가 함께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강 교수와 함께 오찬을 위해 낙산사 근처 식당에 간 일행은 때마침 강연을 위해 이곳을 찾은 현대사 전공의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우연히 만나 점심을 함께 했다. 이런 우연 덕에 <다들> 인터뷰팀은 우리나라 최고의 근·현대사 전공 원로 두 분을 동시에 모시고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근·현대사의 뒷얘기를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이곳 양양 바닷가에 터를 잡게 된 특별한 곡절이 있는지요?

내 고향이 마산이에요. 마루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지요. 정년 퇴임 하면 마산으로 내려가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가보니까 바다가 다 죽었어. 마산이 박정희 시대에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바다의 절반이 메워진 거예요. 남은 바다도 공장 오폐수로 다 죽었더라구.

거기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데, 상지대 총장 때 학생들 데리고 이곳 양양을 지나다가 아파트 지어놓은 걸 우연히 봤어요. 직원을 시켜 바다가 보이는지 한번 가보라 했고, 바다가 보인다기에 대뜸 20평 짜리 아파트를 마련한 겁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리고 교통이 좋아져 2시간이면 서울에 닿습니다.

 

그래도 교통 때문에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양양, 속초 시내에서는 내가 운전해서 다니고, 서울 오갈 때는 버스를 타요. 여기서는 운전 못하면 살기 힘들어. 왜? 대중교통이 거의 없으니까. 노인네들이 서울에 모여 사는 이유가 있어요. 지방에 내려가고 싶어도 운전 못하면 못 내려가요. 대중교통이 거의 없으니까.

 

혼자 사시면 적적하실 텐데요?(웃음)

전혀, 적적할 틈이 없으니까요.(웃음) 내가 남북역사교류위원회 위원장 할 때 북한에 책을 8천여 권 기증했는데, 그러고도 남은 책은 여기 다 갖다놨어요. 사놓고 못 읽은 책이 얼마나 많아요? 요새 그거 읽는 재미를 붙여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건 일본 사람들 책인데, 일본 사람들이 러시아어건 프랑스어건 독일어건 좋은 책은 죄다, 아주 신속하게 번역해요. 번역 수준도 높습니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에게 말해요. “일본말을 배우기는 어렵지 않으니까 일본말을 배워라. 그러면 그때그때 나오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글을 읽을 수 있다.” 러시아어나 프랑스어를 못해도 일본어로 번역된 걸 읽으면 되니까요.

 

 

역사도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써야

선생님은 소설도 많이 읽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자랑 같지만 아마 소설책을 제일 많이 읽은 학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박경리 소설 <토지>를 읽고 쓴 글이 있어요. 소설이 표현한 시대와 역사가 표현한 시대를 구분해서 쓴 글인데, 소설이 표현한 시대가 재밌고, 쉽고, 훨씬 빨리 다가옵니다. 역사가가 표현한 시대는 딱딱하고 재미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토지>는 참으로 탁월한 소설입니다.

제가 박경리 여사와 1970년대 후반에 만주에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중국과 우리나라가 국교를 트기 전이라 홍콩을 경유해서 갔지. 그때가 박경리 여사가 만주에 처음 간 때예요. 그때 들은 얘기인데, 소설 속에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만주가 실은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었다는 겁니다. 만주 연변 현장에 가서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했느냐고 물었더니 지도 보고 썼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러면 소설 쓸 때 생각했던 간도와 실제로 와서 본 간도는 다릅니까?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해란강이 생각보다 너무 좁네요.” 하더라고요.(웃음) 소설가의 상상력이라는 게 굉장하지요?

 

1984년 출간된 강만길 교수의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를 전면 증보해 내놓은 책(2006년 창비)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역사서를 50쇄 이상 판매하신 분입니다. 창비에서 나온 <고쳐 쓴 한국 근대사·현대사>는 52쇄를 찍었지요. 저도 그 책을 읽고 역사서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 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창비에서 생활비를 도와줬습니다. 그 보답으로 쓴 책이지요.(웃음) 창비에 도움이 돼서 큰 다행이었구요.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쉽게 써라, 재밌게 써라.”

안 읽히면 소용없어요. 읽혀야지요. 괜히 어렵게 쓴다고 높은 학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역사를 소설처럼 쓰라고 말합니다. 소설을 많이 읽으면 글이 편안해져요. 우리 세대는 다행히도 일본 소설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우리 소설도 많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고 있는데, 지금 읽고 있는 게 도요카와 히데코의 <두 개의 조국>이라는 소설이에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들이 태평양전쟁 때 당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할아버지·아버지의 조국과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참 잘 썼어요.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글이 쉬워지지요.

 

나한텐 역사 공부가 제일 쉬웠다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습니까?

내가 대학 들어갈 때만 해도 역사학과는 별로 인기가 없었어요. 경제학과나 정치학과가 인기가 있었지. 돌이켜보면 나는 역사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한 지 꽤 오래됐던 것 같아요. 내가 소학교 6학년 때 해방이 됐습니다. 소학교 때까지는 우리글을 잘 못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전혀 안 배웠고, 단군도 몰랐구요.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중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우리 역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단군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 이런 것들을 그때 처음 알게 됐지. 중학교 5학년 때,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때, 6.25가 났어요. 전쟁통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근대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가진 게 아닌가 싶어요.

그때는 선생님들 가운데 의식 있는 분들이 많았어요. 일제시대에는 선생님 못하다가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주로 한문만 하던 분들이 역사 선생님이 된 경우도 많았고, 소학교 선생하다 중학교 선생으로 올라온 분들도 있고. 상당히 의욕적으로 가르쳤지요. 왜? 1년 전까지는 우리 역사를 못 가르쳤으니까. 해방 돼서 우리 역사를 가르치게 되니까 그 분들이 굉장히 의욕적으로 가르쳤고, 나도 거기에 상당히 많은 자극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나마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다른 걸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아. 뭐 내가 장사를 하겠어, 뭘 하겠어? 결국 공부하는 건데,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자질은 아닌 것 같고, 천상 역사 공부가 제일 쉬웠지, 나한테는.(웃음)

 

당대 최고의 한문학자이면서 금석학자였던 청명 임창순 선생을 기리는 청명문화재단 이사장을 오래 하고 계십니다. 청명 선생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내가 대학생 때 그 분이 고려대 강사로 나오셨어요. 한문을 잘하셔서 서지학을 가르쳤는데, 그때 진흥왕비 풀이를 해주셨지요. 그걸 교육 받고 대학 3학년 때 <진흥왕비의 수가신명연구>라는 글을 하나 썼어요. 이게 활자화된 겁니다. <사총>이라는 잡지의 창간호에 실린 것이지요. 학문의 길에 들어서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어요. 대학 3학년이 신라시대의 이야기로 글을 썼는데, 그게 활자화됐으니까요.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출세작인 셈인데, 어떤 면에서는 학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됐지요.

그로 인해 임창순 선생님과 가까워졌고, 이후로도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 분은 소학교 문 앞에도 안 가본 분이지만 굉장한 분이지요.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고, 저항적인 지식인입니다.

 

 

분단시대라는 말을 처음 쓰셨는데, 이 말을 처음 쓰신 게 언제입니까?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라는 제목의 책이 창비에서 나온 게 1978년입니다. 그 전에 계간 <창작과비평>에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썼어요. 천관우 선생의 책에 대한 서평이었는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뭐라고 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했습니다. ‘해방 후 시대?’, 그런데 ‘해방 후 시대’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이는 역사적 용어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분단시대’라고 하자, 그래야 통일의지가 담기지 않느냐, 그렇게 된 겁니다.

근데 막상 그렇게 써놓고 나니까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더라구요. 글만 그렇게 써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민망하잖아요?(웃음)

내가 그동안 남쪽에서 북한에 제일 많이 다녀온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남북역사학회교류협의회를 만들어 남쪽 회장을 맡았지요. 북쪽은 허종호씨가 하고.

 

1978년 창비에서 펴낸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초판과 2018년 ‘강만길 저작집’ 중 한 권으로 다시 펴낸 개정판

 

임진왜란 이후 새 왕조가 들어섰더라면 이후 역사가 달라졌을 것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우리가 문화 민족인데 근대국가를 자력으로 경영해 본 역사가 반세기 겨우 넘는다. 일본만 해도 근대국가 경영이 100년 넘는데…, 그래서 한계가 있다”는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명치유신이나 중국의 신해혁명 같은 것을 못 해봤어요. 대신 남의 지배를 받는 쪽으로 가면서 근대화가 됐지요.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이씨 왕조가 너무 오래 갔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사실은 왕조가 바뀌었어야 했다.” 그랬으면 실학자들이 새로운 왕조의 이데올로그가 됐을 겁니다.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고 그때부터 근대가 시작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됐으면 일제강점기의 애국계몽운동이 공화정운동이 됐을 거구요. 자력적인 근대화가 시작됐을 겁니다. 그럼 식민지 통치를 안 받았을 거구. 조선왕조가 너무 오래 갔습니다.

더구나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위치 아닙니까? 러일전쟁 전에 그런 말이 있었지요. “러시아 세력 손에 한반도 전체가 들어가면 일본을 겨누는 칼이 될 거고, 일본의 세력권에 한반도 전체가 들어가면 대륙을 침략하는 다리가 될 거다.” 그랬어요, 실제로 다리가 되었지요.

그 다음 남북으로 분단이 됐습니다. 분단이 되니까 대륙 국가들과 해양 국가들이 안전해졌어요. 칼과 다리가 반으로 부러졌으니까. 근데 거기 사는 우리는 죽을 맛이지요. 이 사실이 중요해요. 남북이 다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건 4강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립화 통일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중립화 통일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의 국제지식이 대단히 깊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조 500년 동안 지독한 쇄국주의 속에 있었던 탓에 중립화 통일을 할 수 없었지요. 일부 정치가들에 의해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자,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늘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세계사가 많이 변하고 있어요. 냉전시대가 끝나고 지역공동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EU, 아세안, 심지어 아프리카와 남미까지 지역공동체가 생기고 있어요. 우리도 동아시아 공동체, 즉 일본과 중국과 한반도와 지금의 아세안을 합쳐 하나의 동아시아 공동체가 되어가면서 우리의 통일문제가 해결이 되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 통일이 되어도 어느 쪽에도 위해가 되지 말아야 하니까.

동아시아 공동체가 EU처럼 하나의 공동체가 아닙니까? 프랑스가 싫어해서 독일의 통일이 힘들었는데, EU가 되면서 통일이 됐어요. 독일이 적이 아니고 동맹국이 됐으니까요. 우리도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건 역사학쪽에서 반드시 해줘야 되는 얘기인데, 우리는 외교학도, 정치학도, 역사학도 제대로 그 논리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북미회담이 조만간 열릴 것 같고, 북한 김정은의 답방도 성사될 가능성이 큽니다. ‘분단시대 역사학’의 주창자로서 2019년 남북관계 전망을 듣고 싶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진심으로 하는 건지, 노벨 평화상 때문에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정치인이 사기를 칠 순 없잖아요?(웃음) 그들도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평화가 정착되길 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동아시아에서의 미군의 주둔이 어쩌니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되는데, 그건 더 두고 볼 일이고, 어쨌든 동아시아가 평화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데는 미국도 평화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찬성을 해줘야지요. 도와주어야 되겠죠.

 

3·1운동은 우리나라 공화정의 시작

 

올해가 3·1 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시작되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선 1948년이 건국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임시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시작됐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요. 우리가 왕조시대와 대척점에 있는 공화주의를 처음 경험한 게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에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구요. 3.1운동은 하나의 민중운동이고, 역사를 앞으로 진행시켰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우리 공화주의의 역사가 어디서 시작되느냐고 묻는다면 임시정부부터입니다. 물론 임시정부가 일종의 가정부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서 공화주의가 처음으로 나타난 건 대한민국 임시정부부터입니다. 물론 임시정부가 국민들을 직접 다스리지는 못했지요. 그때는 상황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정치 사상은 그 뒤로 공화주의로 갔잖아요?

왕조를 죽 이어오다가 고종 때 대한제국을 만들었는데, 그때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를 했다면, 즉 의회제로 갔다면, 공화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독립신문> 등 몇몇 선구자들은 의회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고종이 몰랐는지, 알고도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공화정을) 안 했습니다. 그러니 대한제국도 왕조였던 셈이지요.

 

올해 86세이십니다. 그런데도 아주 건강하십니다. 직접 운전도 하시구요.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매일 하조대 바닷가를 1만보 걷습니다. 내 걸음으로 6Km, 시간은 1시간 반 걸리지요. 아침에 밥 먹기 전에 다녀옵니다. 공기도 좋고 아주 좋아요. 또 일주일에 한 번씩 가까운데 있는 척산온천에서 두어 시간 냉온탕 찜질을 합니다. 온천에 갔다가 속초시내에 가서 일주일 먹을 걸 장 봐와요. 요즘은 다 먹게끔 해놔서 참 쉽습니다. 세상이 워낙 좋아져서 노인네 혼자 살기 전혀 불편한 게 없어요.(웃음)

 

그래도 혼자 사시면 적적하실 텐데요?

아뇨. 적적한 거 없어요. 읽을 게 얼마나 많은데요?(웃음) 공부하는 사람의 장점이 그런 겁니다. 안 그런 사람들은 심심하잖아요? 우리는 심심할 겨를이 없지요. 읽을 책이 있으니까.(웃음) 가끔 제자들이 놀러오는데, 이젠 제자들도 다 정년이 넘어 퇴임했습니다.(웃음)

 

집필 활동은 안 하십니까?

가끔 청탁이 오면 집필합니다. 요새는 컴퓨터로 하니까 얼마나 편해요? 나는 컴퓨터를 일찍 배웠는데, 역사 공부를 하면서 앞을 내다보는 힘이 생긴 덕이지요. 역사 공부가 과거를 보는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아마 내 나이에 컴퓨터 글쓰기는 내가 제일 먼저 했을 겁니다. 옛날에는 원고지에 써서 출판사 사람이 와서 가져가고 가져오고 야단이 나지 않아요? 요즘은 컴퓨터로 써서 이메일로 보내주고 얼마나 편리합니까? 내가 제자들 보고 “이런 편리한 세상에 글을 못 쓰면 그건 바보다” 라고 얘기합니다. 수정도 쉽고, 이메일로 보내고, 교정도 메일로 보내주고…. 그런데도 글을 못 쓰는 건 말이 안 되지요.

 

권력에 아부하지 말고 현실을 밝혀주는 공부가 진짜 공부

 

역사학자로서 제일 아쉽고 보람된 대목을 각각 꼽으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글쎄요… 책도 쓸만치 썼고, 제자들도 기를만치 길렀고.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 싶은데 못했다 한 건 없는 건 같은데요?(웃음)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욕심이 적었으니까. 내가 장관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정치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학문하겠다 했고, 학문해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건 별로 없습니다.

 

저희가 하고 있는 게 평생교육이니까 이런 질문을 안 드릴 수 없습니다. 평생 학문을 한 분으로, 공부하는 자세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하하, 어렵다.

학문이라는 게 근본적으로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게 있을 수 없어요. 특히 역사학은 진실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내 글이, 내 학문이 진실을 밝히는 데 가까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라는 건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얼마 만큼 진실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것인가? 그걸 모아놓는 게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된단 말이에요. 소설은 재밌으면 되지만, 역사는 진실에 가까워져야 된다, 그런 말이지요. 근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역사적 상상력이 상당히 발달해야 합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높이는 방법은 독서를 많이 하는 방법 밖에 달리 없어요.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 학자들에게 이르고 싶은 말씀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너무 시류에 따라 가는 건 곤란해요. 물론 현실과 떨어져서는 안 되지만요. 현실에 따라붙어야 되지만, 시류에 따라 가면 현실에 너무 아부하는 학문이 될 가능성이 높단 말이에요. 그러면 진실되지 못한 학문이 됩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데, 현실을 얼마 만큼 밝혀내느냐, 추구할 거냐가 중요하지, 현실에 따라가는, 나쁘게 말하면 아부하는 건 결단코 안 되지요. 근데 그런 글들이 더러 나옵니다. 이런 글을 읽어보면 이건 뭣 때문에 썼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구요. 학문은 무조건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왼쪽)와 점심을 함께 했다.

 

오전 11시 조금 넘어 시작된 인터뷰가 정오를 훌쩍 넘겨 12시30분쯤 끝났다. 노학자는 모든 질문에 막힘 없는 답변을 이어갔고, 대답들은 명징한 기억력으로 뒷받침됐다. 인터뷰 뒤 점심을 먹으러 낙산사 근처 식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90이 가까우신데, 육체적 건강도 그렇지만 정신적 건강도 대단하십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 “몇 년 전에 어디 가서 강연을 하는데, 다산 정약용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웃음) 한동안 아득해지면서 청중들한테 되물었어요. 그 사람 있잖아요? 귀양 갔다가 책도 많이 쓰고 한 그 실학의 대표적 학자 있잖아요?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내가 건강해 뵈도 이렇습니다.(웃음)”

 

 

강만길은 누구인가

193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다. 1976년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나, 광주항쟁 직후 항의집회 성명서 작성, 김대중으로부터 학생선동자금 수수 혐의 등으로 구금되어 1980년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4년 만인 1981년 복직해 1999년 정년 퇴임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 수행원으로 방북했으며, 2001년, 상지대 총장에, 2003년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김대중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약 10년간 통일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2년 유신 후 독재정권 비판문을 쓰면서 저항적 지식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0년,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를 창간해 역사 대중화에 앞장섰고, 2007년에는 (재)내일을여는역사재단을 설립해 젊은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