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향한 교학상장(敎學相長)

 

그가 야학의 산증인이 되기까지

김미지: 먼저,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웃음) 오늘 이 자리에서 선생님께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일단 ‘수원제일평생학교’의 역사가 깊다는 건 알았지만, 찾아보니 개교한 지 50여 년이 훌쩍 지났더라고요. 정말 놀랐습니다.

박영도: 맞습니다, 수원제일평생학교는 1963년 개교한 수원제일야학이 전신이에요. 당시 사회가 한국전쟁 이후 모든 기반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을 때였죠. 그때 우리나라 GDP가 890불 정도였어요. 아주 가난했던 거죠. 그러다 보니 나라를 잘 살게 하는 게 제일 큰 화두였고, 이를 위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게 있었어요. 그 국가재건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야학이에요. 초기에는 지리상 오산공군기지가 가깝기 때문에, 80년대 초반까지 공군에 의해 운영됐죠. 하사관, 장교가 교사로서 주축이 되고, 교장도 당시 공군대령, 준장 이런 분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과 더불어 군인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서 철수하는 바람에 대학생들이 운영을 맡게 되었고요. 이후 민간에서 운영을 해오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온 거예요. 엄밀하게 말하면, 주인이 없는 학교죠. 사립도 국립도 아니고 국가가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한 지역사회에서 이렇게 60년의 역사를 가져온 건, 어떻게 보면 하나의 문화재와 같다고 생각해요.

 

김미지: 그렇다면 수원제일평생학교라는 학교명은 언제부터 사용한 건가요?

박영도: 2009년 5월 1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야학이라고 하면 어둡고 가난했던 역사, 이런 이미지가 잠재해 있잖아요. 그래서 보다 도전적이고 미래 비전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원제일평생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사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야학에서 더 진일보한 계기를 만들고 싶었죠. 당시만 해도 지금과 달리 사회에 평생교육, 평생학습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어요. 교육학의 한 부분으로는 존재했지만 오늘처럼 기반을 잡은 개념이 아니었죠. 그때 모험을 한 거예요. 어쩌면 평생학교라는 명칭은 제일 먼저 썼을 수도 있어요.(웃음) 이전에는 본 적이 없으니까요.

 

 

김미지: 선생님께서 수원제일평생학교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 언제였나요?

박영도: 1994년도에 모집공고를 보고 자원해서 교사로 왔어요. 당시 30대 중반쯤이었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죠. 그때는 현 위치가 아니었고, 5~6명 대학생들이 운영하고 있었어요. 교실도 남루하고 학생들도 10명 내외였죠. 와서 보니 운영체계가 전혀 잡혀있지 않더라고요. 1년 6개월 정도 봉사하며 교사를 했는데, 학교가 존폐 위기를 맞았어요. 교사 중 제가 가장 연장자였고, 대외적으로 교장 아닌 교장, 그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사실 저마저 손을 놓으면 학교는 문을 닫는 거였죠. 그렇게 지금까지 운영을 맡으며 끌어온 거예요. 교칙을 보면 교장 임기가 3년인데, 독재하고 있는 거죠.(웃음).

 

김미지: ‘야학의 산증인’이라고도 불리시는데, 이 분야에 관심과 발을 들이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박영도: 대학에서 미생물을 전공했어요. 인문과학도 아니고 사실 평생교육과는 전혀 관계없는 학과죠.(웃음) 야학을 처음 접한 건 1979년도예요. 제가 78학번인데, 대구에서 대학을 다녔어요. 대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선배가 어느 날 저녁에 어디를 가보자고 해서 따라간 게 오늘 날 말한 야학이었죠. 그때 야학은 대학생들의 전유물처럼 되어있었어요. 문화, 분위기도 어두침침하고.(웃음) 처음에는 그다지 심오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몇 번 더 가면서 차츰 분위기에 배어들었어요. 그러다가 군대를 갔고,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서 아주 조그만 종이에 야학 교사를 모집한다는 글귀를 보고는 전화를 했어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야학 교사를 시작한 곳이 대구에 있던, 지금은 없어진,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예요. 가니깐 폐가가 된 동사무소 건물 한쪽 귀퉁이에서 학생 20명 정도를 가르치고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임시 수업을 하다가 다음해부터 담임도 하면서 책임감도 부여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그렇게 2년 정도 활동하다가 학교를 운영하는 교장을 맡게 됐죠. 그때가 제 나이 겨우 28세였어요.(웃음)

 

 

김미지: 그렇게 쭉 야학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신 거군요.(웃음)

박영도: 이후 석사를 마치고 취업을 해서 수원농진청 연구직 공무원으로 2년을 일했어요. 그러면서도 주말마다 대구를 오가면서 야학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 그렇게 학생들을 모두 졸업시켰죠. 그러다가 제약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직장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게 1988년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료 직원이 야학 교사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권하더라고요. 그가 개인사정으로 교사를 그만두어야 하는데, 제가 야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줄 알고 권했던 거예요. 일단 어떤 분위기인가 살펴보려고 한번 가보자고 했죠. 그곳이 현재 YMCA 부설 청소년학교였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교사를 1년 정도 열심히 하다가 또 교감을 맡게 됐어요. 이후 또 이직을 했는데, 당시 사무실이 있던 오산에서 1년을 용산까지 출퇴근을 하면서 야학과 관계를 맺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웃음) 그러다가 회사에서도 점점 직책이 올라가고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제약을 많이 받게 됐죠. 야학 수업이 있는데, 회사에서 중요한 오더가 내려오면 갈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4개월 정도의 공백을 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통근 버스를 타고 수원역에 내리는데 전봇대에 야학 교사 모집 전단지가 눈에 띄었어요. 바로 이 학교의 전신인 수원제일야학이었고, 그게 1994년 11월이었어요.

 

김미지: 말씀을 들을수록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렇게까지 야학의 끈을 놓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해요.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있으셨던 건가요?

박영도: 사명감?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그런 지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처음 야학을 접하면서 느낀 신선한 충격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경북사대부고를 나왔는데, 당시 그 지역에서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집단이었어요. 그 학교를 졸업하면 ‘스카이’를 가는 게 당연시했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사실 그쪽으로 꿈이 딱히 있지 않았지만, 주변 권유에 의대를 준비했는데 입시시험에 실패했죠. 4남 1녀 장남인데, 아버님께서 농사만 지었기 때문에 재수는 허용되지 않았어요. 빨리 내가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거죠. 그 속에서 어린 마음에 갈등하면서 방황을 많이 했어요. 1학년 때는 학교도 잘 안 나가고, 열정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음악을 하겠다고 하고.(웃음)그 과정에서 야학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거죠. 뭔가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게 자연스레 몸에 배어서 환경이 바뀌어도 지속한 거고요. 사실 관심이 없었으면 설령 그게 내 옆에 흘러 다녀도 그냥 지나갔을 텐데, 늘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교육 공동체, 한걸음 더 나아가 삶의 공동체를 꿈꾸다

김미지: 수원제일평생학교도 그런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학교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어요.

박영도: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건 역시 경제적인 문제예요. 늘 마이너스 살림이죠. 후원(조직)이 따로 없으니까요. 지금 학교의 학습자가 250명, 교사는 50명 정도 돼요. 교사들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자원봉사예요. 1년 예산의 60~70%를 공모사업이 차지하는데, 그게 제일 큰 수입원이에요. 나머지는 지금 졸업생이 6,000명 가까이 되는데, 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행사 때마다 십시일반하고, 그 외 부분은 이제 저의 몫이죠. 한편으로는 그런 것도 있어요. 많은 분이 학교가 60년 역사를 가져올 수 있었던 큰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해요. 거기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학교가 가난하기 때문이에요. 만약, 우리에게 자산이 많았다면, 아마 3년 마다 교장 선거를 할 때 피터지게 싸웠을 거예요.(웃음) 복잡한 갈등이 있겠죠. 그런데 단 한 번도 그런 게 없었어요. 가져갈 것도 나눌 것도 없기 때문이죠. 부족한 부분은 제거 해결해야 할 몫이기 때문에 교사들 입장에서는 크게 관여할 필요성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까지 온 거고, 내년에도 아마 그렇게 계속해서 갈 거라고 생각해해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을 축적하면서 모아왔다면 굉장히 어려운 고비가 여러 번 왔을 것 같아요.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면서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장점은 있어요.

 

김미지: 말씀하신 한 곳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박영도: 1차적으로 학교가 갖는 비전은 1세기 역사 만들기, 개교 100년을 맞는 거예요. 이제 그 반환점을 맞았죠. 그 60여 년의 과정에서 우여곡절 많은 고비를 겪었어요. 앞으로 가야할 길도 사실 그에 못지않은 길일 거라고 봐요. 수없이 많은 장애가 올 것이고 그걸 극복해야 하겠죠. 그때가 되면 제 물리적인 나이가 106살이에요. 소망이 있다면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가보고 싶어요. 내일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지만, 당연한 소망이고 학습자와 교사 모두 그러한 공감대를 갖고 믿으면서 가고 있어요. 또 지금은 배움의 공동체로 가고 있지만, 결국엔 지역사회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해요. 학습자 250명 중 연고가 없는 분이 30명 정도 됩니다. 그 분들의 마지막 임종, 죽음은 제 몫일 거예요. 제가 상주 노릇을 하면서, 그들의 마지막을 거두어야 하겠죠. 그런 걸 보면 사실 배움의 공동체만으로는 가기에는 여러 정체성과 철학이 맞지 않아요. 저 또한 아흔, 백 살이 되면 학습자가 되어서, 이 공간에서 배우며 그러다가 죽어가지 않을까… 실제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게 배움 속에서 삶을 나누고, 함께 살다가 죽어가고, 또 다른 세대가 이를 이어가고… 그렇게 100년의 역사가 완성될 거라고 봐요.

 

 

소통이 가능한, 그래서 모두가 즐거운 학교

김미지: 그런 이상과 꿈을 그리시는 것도, 실제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겠죠?

박영도: 이 사회 들어서 민주시민교육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우리 학교에는 특별한 규칙이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지켜야할 것에 대해선 굉장히 엄격해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위기가 오면 모이고 도울 줄 알고요. 민주시민교육을 할 필요가 없어요.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지저분하면 자발적으로 청소도 하고. 오늘 이 떡도 학습자 중 한 분이 식당을 개업하셨는데, 학교에 나누고 싶다고 보내신 거예요. 이런 게 일상이죠. 서로가 함께 하려는 것. 학습자도, 교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우리 학교 교사들은 짧게는 3년부터 20년 이상 되신 분들까지 계세요. 만약 여기 오기까지 그런 철학과 문화가 없었다면 신입 교사만 남았을 거예요. 이들이 계속해서 여기에 남아있는 걸 보면 1차적으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철학이 잘못된 건 아니구나, 생각해요. 그 한 분 한 분의 존재가 다 의미 있고, 그래서 많은 부분 다른 기관보다 끈끈하게 모여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사람이 300명 사는데 일이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다행히 저를 신뢰해주셔서 제가 중재해서 해결하죠. 또 그게 제 역할이고요.

 

김미지: 선생님께서 학교를 끌고 가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육 철학이 궁금합니다.

박영도: 학습은 즐거움이 먼저예요. 유익함은 그 다음이죠. 모두가 즐거운 학교가 행복한 곳이에요. 각자의 개성과 삶이 살아있어야죠. 이곳에 계신 분들의 표정을 보시면 쉽게 아실 거예요. 다들 즐거운 표정을 하고 계시잖아요. 그건 학습자와 교사 사이의 소통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해요. 우리 학교는 굉장히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두 사이에 벽이 없죠. 선생님들의 원동력은 사실 학생들에게서 나와요. 그들의 사랑, 저 역시 가슴 뭉클할 때가 있어요. 물론 365일 중 330일이 힘들지만,(웃음) 30일의 뭉클함이 큰 힘이죠. 그런데 공교육 속 교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죠. 대한민국의 미래가 교육에 있다면 학교부터 변해야 해요. 학습은 보상과 대가 없이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제가 할 일은 학교에 오는 게 설레고 즐겁다고 말하는 그들이 학습을 계속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김미지: 학교에 오는 학습자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인가요?

박영도: 초창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학교에 못 간 어린아이가 다수였어요.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반대로 60~70대 할머님들이 많아요. 사회적 분위기나 배경으로 인해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기능적 학습이 전혀 안 되어있으세요. 은행 업무나 스마트폰 사용도 힘들고, 자식들과 문화적 격리감도 크죠. 특히 한국은 학벌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많이 좌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삶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죠. 사회적 체약자, 소외계층으로 전략할 수밖에 없어요. 그분들이 한글 기초부터 초‧중‧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까지 배울 수 있어요. 최근에는 성인 문해교육도 학력인증제도가 마련되어서 우리 학교를 졸업하면 국가가 졸업장을 줍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만든 제도예요. 이제 그분들이 학습을 포기하지 않도록 동기부여 해주고 상담도 하고, 불편한 게 있으면 해결하고, 선생님들 활동을 도와주는 것, 그게 제 몫이죠.

 

김미지: 학생은 주로 어떻게 모집하나요?

박영도: 초기에는 인쇄 시스템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주로 큰 갱지에 매직으로 써서 수원 시내 담벼락, 전봇대, 게시판 등에 주말마다 붙이고 다녔어요.(웃음) 그 뒤에는 현수막, 지역 정보지 등을 활용했는데 지금은 학습자들의 입소문에 의해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서 광고를 적극적으로 하면 학습자들을 다 받지 못해요. 그래서 지금은 가만히 있어요. 그래도 충족이 되고, 심지어는 돌아가시죠. 오히려 유사 기관에서 학습한 분들이 우리에게 오려고 하면, 거기도 좋으니 거기에서 하라고 만류하는 편이죠. 수원제일평생학교는 입학시즌이 없어요. 1년 365일 개방되어 있어서 내일 졸업식이라도 오셔도 됩니다.(웃음) 오시면 수준에 맞는 상담을 해서 과정을 안내해 드려요.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편이죠.

 

 

김미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학습 과정이 궁금해지네요.

박영도: 초‧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각각 3년이 걸리고, 이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예비과정을 1년 갖든지, 혹은 자신이 있다면 바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반에 가서 졸업 자격을 따게 돼요. 대학도 많이 가세요. 저희 학교는 다른 데와 다르게 학습 수준별 시리즈 프로그램을 다 가지고 있어서, 학습자가 들어오면 8년 정도는 여기에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또 그밖에 컴퓨터, 스마트폰 교육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반 교육, 외국어 교육도 하고요. 합창부와 같은 동아리 형태 활동도 있고, 전체 20개 프로그램이 매일 같이 돌아가고 있죠. 그 외에도 일반 학교가 하는 행사를 그대로 다 합니다. 졸업식, 수학여행, 체험학습, 견학, 졸업여행 등. 그런 게 없으면 학습자가 아무리 단단한 마음을 가져도 지치고 포기하기가 쉬워요. 학교가 그걸 하는 큰 이유는 적재적소에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동기부여를 해주기 위함이에요. 연말이 되면 성과발표회, 반별 장기자랑도 하고요. 나이만 다를 뿐이지 일반 학교와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김미지: 그 많은 수업과 프로그램이 이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박영도: 이 공간은 수원시 소유 건물이고, 저희는 3층만 임대하고 있어요. 2011년도에 오갈 데가 없어서 우여곡절 끝에 여기에 들어왔죠. 교실은 총 4개이고, 가장 큰 교실은 30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교실이 시간마다 계속 순환하는 거죠. 그 외에 아주 작은 컴퓨터실이 있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분들은 주경야독을 하니 직장에 갔다가 식사를 못하고 오세요. 그분들이 간단한 요기 거리를 할 수 있도록 간이 탕비실을 마련해 놓았어요. 건물 1, 2층에서 주민자치프로그램이 돌아가는데 시간이 겹치지 않을 때는 함께 사용하기도 해요. 지금 이 지역이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어서, 사실 상반기까지 공간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그러나 시 차원에서도 한 지역에서 반세기 역사를 지닌 학교는 개인 소유라기보다는 시의 자산이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래서 시와 협의해 4년 후에는 재개발 되는 동사무소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들어가기로 했어요. 공공과 민간이 어떤 거버넌스를 가질 수 있는가, 전국 최초로 사례를 만들려고 해요. 그 절차에 따라서 조례도 마련하고 시의회 승인까지 받아놓았어요. 그때까지 이제 공간을 한번 옮겨야 하는 거죠. 지금 이 건물도 굉장히 오래된 건물이지만, 우리가 학습할 정도로는 편하게 잘 썼는데 비켜주어야 할 시기가 왔어요. 현재 여러 방법을 모색 중이에요.

 

 

김미지: 부디 공간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바랍니다. 우선 안정적인 공간이 담보되어야 학습도 가능할 테니까요. 학교가 다른 곳에 가게 된다면, 그때 또 방문할게요.(웃음)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수원제일평생학교가 선생님의 삶 속에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영도: 지금은 돌아설 수가 없는 신앙이자, 생활이에요. 저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기독교인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그것으로 일주일의 정신적 휴식을 가져가듯이,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속에서 제 삶, 사회 생활, 가정사 등 많은 고민을 하고 해결해 가죠. 그런 공간이 되어버렸어요. 물론, 늘 직장과 이 생활은 병립해왔어요. 정말 복잡할 때는 만만한 게 잠자는 시간이니, 그것을 줄여가며 살아왔죠.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도 몇 시에 자도 일어나는 시간은, 정말 피곤해서 안 되면 다시 자는 한이 있더라도, 항상 4시 반이에요. 그만큼 오랜 시간 제 삶의 한 부분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와도 스스로 그만두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훌륭하다는 건 아니에요. 저 역시 이것으로 인해 포기한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되짚어 보면 인생의 승부를 어느 시점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제가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