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내가 살아온 길

 서울시 무형문화재, 북촌에 작업실을 열다

김경열 홍염장을 찾아간 날은 북촌 한옥마을로 작업실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종로 2번 마을버스가 서는 ‘빨래터’ 골목에 자리잡은 작업실은 고즈넉한 안마당에, 한지 문을 열면 벽에 붉은 갑옷이 걸려 있고, 반닫이 위에는 섬세한 자수 방석들이 놓여 있다. 붉은 갑옷도, 자수 방석도 모두 김경열, 이형숙 부부가 복원한 문화재다.

‘홍염장’이란 홍화꽃으로 천연염색을 하는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잇꽃이라고도 부르는 홍화의 열매가 홍화씨다. 대접받은 홍화차는 구수하고 맛있었다.

김경열 장인은 국내 최초로 홍염장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된 인물이다. 붉은 색은 임금의 색으로, 우리는 빨강이라고 통칭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농도에 따라 은홍, 다홍, 연홍, 분홍, 대홍 등 30여 가지 이상의 이름으로 불렸다. 염색 횟수에 따라, 정련방법에 따라 다양한 붉은색이 나오는 것이다.

 

 

운명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

명주실 공방을 운영하던 김장인이 문화재 복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문화재 전문위원 김영숙 교수와의 인연 덕분이었다. 1991년 숙대 박물관의 활옷 복원을 시작으로, 다음 해 티벳의 홍염 가사를 복원했다. 티벳 가사를 복원할 때는 초창기라 어려웠는데, 가사에 사천왕상 등의 복잡한 자수가 놓아져 있어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할 때, 마침 아내에게 자수를 배우겠다고 와있던 홍대 미대 출신의 수강생이 그림을 잘 그려 무사히 자수를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을 하다보면 적재적소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복원은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갑옷 같은 경우도 염색뿐 아니라 침선, 두정 제작 등 여러 분야가 함께 해야 한다. 갑옷의 금제 장식은 갑옷을 복원하기 수년 전에 선생님의 권유로 사두었다. 당시 금제 장식을 만든 분은 갑옷을 복원할 마음으로 만들었지만, 갑옷 염색할 사람이 없어 시간을 보내다 만든 장식을 사용하지 못하고 팔았던 것. 그것이 김장인의 손에 와서 이렇게 인연이 닿아 복원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멘토이신 김영숙 교수뿐 아니라 신기숙 관장, 김인숙 교수, 김지혜 선생 등 주변에서 도움주고 문화재 복원의 길로 이끈 사람들이 많았다. 그분들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살지 않는 조선시대 사람

티벳 가사를 복원하다 보니 우리나라 가사에도 관심이 갔고, 알아보니 대관령, 고려대박물관, 선암사, 대흥사 등에 가사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한점 한점 복원하다보니 세월이 갔고, 홍염이 운명처럼 인생에 스며들었다. 김장인은 남산 한옥마을에서 2003년부터 염색전을 개최했는데, 할 때마다 품목을 달리해 2007년에는 가사전을 했고, 2009년에는 원삼, 철릭 등의 왕실복식전을 했다. 그리고 2008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았다.

홍화는 식물성 섬유에선 분홍색만 빨아들인다. 명주(=견)에서만 노란색과 빨간색을 같이 빨아들인다. 이 붉은 색을 빼기 위해 알칼리성 잿물을 써야 하는데, 잿물도 종류가 다 달라 콩대, 뽕나무, 상수리나무, 홍화대 등 종류별로 잿물을 만들어 시간을 재며 ph를 내고 기록한다. 거의 실험이다. 그런 잿물들이 작업실 바깥 쪽마루 진열장에 빼곡이 늘어서 있다.

규장각 의궤와 실록의 복원 작업(책 표지가 붉은 비단천으로 되어 있다)도 했는데, 양동마을에서 수직기로 짠 천을 가져와 색을 내기 위해 정련 시간을 10분 단위로 잘라서 보고, 1시간 20분만에 드디어 제대로 색이 나온 적도 있다.

제대로 된 붉은 색 하나를 내기 위해 이렇게 긴 시간과 노력, 비용을 들여 연구하는 것은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대단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그래서 김장인은 스스로를 “조선시대 아닌 조선시대를 사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느림을 견디지 못해 떠났다. 김장인은 어린 시절부터 명주실을 짜고 해사하고 꼬면서 그 시간들을 견뎠고, 운명처럼 이 일을 하고 있다.

 

 

손재주를 타고 난 게 아니라 하다보니 훈련된 것

우리나라는 문화가 단절되어 10대와 60대가 서로의 문화를 잘 모른다. 수예교육도 정규교육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명주실 잣는 물레를 연날리기하는 얼레냐고 묻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다. 김장인은 전통문화대학원에서 석박사들을 가르치며 실을 감고, 해사하고, 꼬는 방법을 가르쳤다. 정련하여 물들이는 법도 가르쳤다. 이제까지는 대학에서만 강의했는데, 앞으로는 북촌 교육장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승교육을 더 많이 실시하겠다고 한다.

김장인에게 손재주를 타고 나신 편인가 물었더니 “재주 보다는 마음가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약 집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오래 훈련하고, 목표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다 보면 할 수 있다고 했다.

김장인은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운 사육신 성삼문의 시조를 지금도 잊지 않고 외우고 있다. 죽기 바로 전에 쓴 절명시 한구절은 이렇다.

“목숨을 재촉하는 북소리 둥둥 울리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지려는구나. 황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밤은 누구네 집에서 묵으려나.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그는 이 시를 읽는 순간 남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 가면 되지 않겠나, 인생의 갈피를 잡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