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갭이어(Gap year), 그리고 한국

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 학교 밖 여러 활동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진로탐색을 위한 체험을 하는 1년여의 유예기를 가리키는 ‘갭이어(Gap year)’. 요즘은 일반화되다 보니 직장과 직장 사이의 유예기간을 갭이어라 부르기도 한다. 갭이어는 2000년대 초반 영국의 왕세손 해리 왕자와 윌리엄 왕자가 각각 칠레와 호주에서 갭이어를 가진 것을 계기로 세계에 알려졌으며 2016년에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큰 딸 말리아가 대학 입학을 1년 미루고 갭이어를 선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갭이어가 생긴 기원부터 영국과 미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에서 갭이어 활용에 대해 알아본다.

 

영국 귀족집안 자제들의 견문 여행이었던 갭이어

갭이어는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의 귀족집안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그랜드투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랜드투어는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 로마 유적지 등을 여행하며 견문을 두루 넓힌 여행이다. 동행하는 교사가 있었고, 수개월에서 2년까지 긴 기간 동안 여행했다. 이 여행이 일반 여행과 구분되는 지점은 ‘해외 문화를 익히고, 지성을 쌓는 경험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이룬다’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금수저들의 세월 좋은 여흥이 아닌가 싶지만, 당시 보수적이었던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의 발로로 개척된 새로운 배움의 방법이 바로 그랜드투어였다.

본격적으로 ‘갭이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해외 봉사, 인턴, 여행, 워킹 홀리데이 등의 프로그램이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갭액티비티 프로젝트’가 생겨났고, 이 프로그램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대학생들에게 갭이어를 적극 권장하는 영국

영국은 갭이어가 시작된 나라인만큼 갭이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이다. 학생들이 의무교육을 마친 후 대학교 입학이나 취업 전에 1년간 공식적인 휴지기를 가질 수 있는데, 의무교육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전에는 만 17세였던 갭이어 시기가 요즘은 만 18~19세로 바뀌는 추세다. 중등교육과 대학과정 사이, 청소년과 성인 사이의 전환기에 학생들이 정체성을 성찰하고, 자기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다.

갭이어를 가지면서 대학교 입학을 1년 미루는 것을 입학연기(Deferred Entry)라고 하는데, 입학 전 지원서에 이를 명기하고 활동 계획을 설명하면 된다. 갭이어가 끝난 뒤 다시 지원할 경우에도 갭이어 사실이 입학 심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역시 사회적으로 갭이어에 대한 인식이 좋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갭이어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기에 특별하게 이수해야 하거나 정해진 과정이 없다. 국가 시민교육 프로그램, 청년 자원봉사 프로그램 등의 촉진 프로그램이 있을 뿐이다. 다만 갭이어 기간 동안 여행이나 자원봉사 떠나는 학생들을 위해 영국규격협회가 만든 ‘국외 모험활동을 위한 영국 기준’을 준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갭이어 기간 동안 여행, 해외 자원봉사, 어학 과정 이수, 역사 문화 탐방을 하거나 춤, 운전, 스포츠 등의 기술이 필요한 활동을 배우거나 인턴십, 취업 등을 통해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한다. 갭이어를 보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은 대학등록금을 벌거나 근무 경험을 얻기 위해서 갭이어를 보내기 보다는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고 학업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휴식을 갖기 위해서 갭이어를 보낸다고 답했다. 즉 갭이어를 재충전의 기회, 동기 부여의 기회로 사용하고 있다.

영국의 개별 갭이어 사례 중 사우샘프턴의 솔렌트 대학교의 경우, 진로설계사를 두고 학생들의 진로 계획을 돕는다. 또한 20학점을 인정해주는 커리큘럼 플러스(C+)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력 관리 및 진로 설계활동, 스포츠 코칭, 업무기반 학습, 지역봉사활동, 언어학습, 영어교육, 기업가 정신 교육 등 학교에서 지정한 활동을 하고 학점을 받는다.

갭이어를 도입한 후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 수가 급격히 줄고, 학업성취도도 15% 이상 향상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갭이어를 경험한 학생들 중 84% 이상이 갭이어 기간 동안 자존감 향상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이런 관계로 영국의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갭이어 프로그램의 참여를 권장하고 있다.

 

터프트·프린스턴 등 미국 대학들의 갭이어 프로그램

유럽과 달리 쉬면서 자기계발을 하는 일이 잘 없는 미국에서도 갭이어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 비율적으로는 갭이어 참여 학생이 아직 적지만,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갭이어를 경험한 학생들이 대학생활에 잘 적응하고, 진로선택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기에 입학 지연을 허용하는 대학이 늘고 있으며, 갭이어 관련 상담교사를 고용하는 고등학교들도 늘고 있다.

미국 내 갭이어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학교 자체 내의 갭이어 프로그램과 다양한 개별 기관의 갭이어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2009년부터 매년 30여 명 정도를 선발하여 브릿지이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9개월 동안 중국, 인도, 볼리비아, 브라질, 세네갈 등의 나라에서 현지 가족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운 후 그 나라의 봉사활동 기관들과 연계해 지역 봉사활동을 한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 등이다. 각 지역에는 코디네이터가 있어 학생의 안전과 지원을 책임진다. 이 외에도 하버드, 다트머스, 플로리다 주립대 등 여러 대학이 갭이어를 도입하고 있다.

아메리칸코어라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시티 이어 프로그램은 11개월간 빈곤지역에 거주하면서 교육, 환경, 공공치안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주로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 가서 그 학생들과 결연을 맺어 멘토 역할을 수행하는 교육 활동을 하게 된다. 시티 이어 프로그램은 미국의 100여 개 대학과 연계하여 운영되며, 봉사활동 기간 동안 장학금을 주고, 리더십 개발 및 훈련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전액 지원이기 때문에 경쟁률이 매우 높다. 이런 프로그램에 지원하지 않으면서 갭이어 기간 동안 공예, 자동차 정비, 동물케어, 환경보호 사업, 건강관련 사업, 스포츠, 정보기술, 방송통신 분야에 종사하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는 학생들도 많다. 이 경우엔 한 개의 장기 프로그램이 아니라 1개월~6개월 사이의 단기 프로그램 여러 개에 참여한다.

 

일본 도쿄대 갭이어 선도, 부의 불균형 이유로 도입 꺼리는 대학도…

도쿄대학교는 가을학기제 입학을 검토하면서 대학입시를 통과한 시점부터 대학 입학 시점까지의 시기 동안 갭이어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2013년부터는 FLY(Freshers’ Leave Year Program)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대학 신입생들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재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휴학 형태로 신청하는데, 이 기간 동안 보험을 들어야 하며, 활동이 끝나고 나면 보고서를 제출한다. 활동은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 학술참관, 연구실 체험, 언어학습 및 이문화 프로그램, 리더십 육성, 독서 등의 지적인 모험과 도전 활동. 둘째, 자원봉사, 인턴십, 국제교류 체험, 홈스테이 등 사회체험. 셋째, 기초학력 양성 프로그램, 체력증진, 외국인 학생 대상의 일본어 프로그램 등 대학에서의 배움을 위한 기초 형성 프로그램이다.

도쿄대학교에서 갭이어를 선도하고 있지만, 일부 대학에선 갭이어 도입을 꺼린다. 학생이 해외에서 공부하기 위해선 부모들의 재정 부담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부모의 부에 따라 불균형이 조장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전통적인 고용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1년 늦게 사회에 나오면 취업에 불리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크다.

 

걸음마 단계 한국, 청년의 성장을 기다려주는 사회 공감대 필요

한국에서 갭이어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청년허브, 모두의학교, 은평청소년미래진로센터 등에서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불규칙한 단기 강좌의 형태이고, 민간에서 자유학교, 퇴사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시작한 지 1~2년이 채 되지 않았다. 검색창에 갭이어를 쳐보면 가장 먼저 뜨는 한국 갭이어는 여행 중심의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알바천국이 2010년부터 운영하는 ‘천국의 알바’, 롯데리아의 ‘글로벌 원정대’를 비롯, 아시아나 항공과 하나투어 등에서도 대학생 대상의 여행 후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나 1년을 쉬는 갭이어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맹목적 구직, 스펙 위주의 활동으로 청년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대단히 부족하다. 구직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모름’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21%나 되었으며, 2016년 한해에만 학업을 중단한 중고생이 6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70% 이상의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학입시가 끝나자마자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청년들에겐 나의 삶이나 미래를 고민해보는 시간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게 허겁지겁 취직하고 나서야 이 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으며 취업을 중단하는 비율 또한 점점 높아지고 있다. 취업준비의 기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공무원 시험 준비 기간뿐 아니라 스펙과 토익점수를 높이기 위해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휴학하는 기간 역시도 길어지고 있다. 취직한 사람들은 몇 개월 다니지 못하고 직장을 나오고,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의 기간을 늘이려고 휴학을 반복하고 졸업을 유예한다. 사회적으로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갭이어를 정착시키기 위한 골든타임일지도 모른다. 스펙을 쌓기 위한 휴학, 취업을 준비하는 기간, 누구나 겪고 있는 그 시간의 일정부분을 떼어내어 갭이어로 만들면,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도 있고,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나와 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이 진짜로 해주어야 할 것은 인생전환기를 맞이한 청년들에게 다양한 사유와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갭이어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 필요가 있다.

갭이어가 정착되기 위해선 먼저 사회적인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영국에서 갭이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만큼 청년의 시기에 1년 정도는 고민하고 방황할 수 있고, 이를 기다려주면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공감대가 있기에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 있어서 갭이어로 인한 차별이 없다. 쉬고 싶어도 취직해야 할 직장에서, 입학해야 할 대학에서 쉰 사람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쉴 수 없을 것이다.

청년들이 더 멀리, 더 건강하게 도약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갭이어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금수저 부모가 없어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쉬면서 자신을 돌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시간도, 돈도 부족하다. 이런 부분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준다면 청년들이 한 발짝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뒷받침 안에는 지원비와 시간뿐 아니라 고립되어 있는 청년들이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커뮤니티, 사람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