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인생 최고의 기쁨이더라”

웹진 <다들>의 간판 코너라고 할 수 있는 멘토 인터뷰가 막을 내린다. 2015년 11월 신영복을 시작으로 홍세화, 최재천, 채현국, 조정래, 조은, 정혜신, 이수정, 오연호, 김제동, 김용택 등 그간 33회에 걸쳐 35명의 멘토를 만나 인터뷰를 했고, 이 지면을 빌어 그 이야기를 나누어왔다.

그 3년 반의 마무리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 코너를 진두지휘했던 인터뷰어 김영철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장을, 이번에는 인터뷰이로 소환했다. 함께 멘토 코너를 진행했던 황미연 홍보·대외협력팀장과 김지현 주임이 질문을 던지고, 김 원장이 대답을 하며 서로의 기억을 나눴다.

 

신영복 선생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첫 멘토 인터뷰

 

창간호부터 다시 짚어보면 좋겠어요. 첫 인터뷰이가 고 신영복 선생이었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평생교육기관인 광명평생학습원을 성공회대가 위탁 운영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 신영복 선생이 성공회대 인문학습원도 만들어 평생교육을 직접 실천하셨지요. 그래서 모시고 싶었는데 병환이 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인터뷰에 응해주실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접촉하자마자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셨어요. 인터뷰 장소였던 시청 앞 성공회대 대성당에서 처음 뵈었을 때 아주 건강해보였고, 1시간 반 넘게 시종 꼿꼿한 자세로 인터뷰에 응해주셨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건 이 분이 말한 것을 그대로 쓰면 기사가 되는, 문장이 되는, 그런 정연하고 유려한 화법을 구사하셨던 점입니다.

인터뷰 모두에 제가 물어봤지요. “사람들이 선생님 아프시다고 걱정을 많이 하는데, 어디가 아프십니까? 병세가 어떠십니까?” 그때 처음으로 선생이 세상에 대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병이 흑색종암이라고 얘기하셨어요. 백과사전에 찾아봤더니 오랫동안 햇볕을 못보면 걸리는 병이라고 해요. 선생이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당시 두 명의 암 전문가로부터 중병 암환자의 임상실험 중이라는 말씀도 하셨구요. 그런 말씀을 듣고 인터뷰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선생이 아무렇지 않게, 아주 건강하게 말씀하셔서 오래 살아계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터뷰 한달 반 만에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그때 이미 굉장히 아픈 몸을 끌고 그 자리에 나오신 겁니다. 인터뷰 하기 전에 선생을 모시고 나온 성공회대 김창남 선생과 인터뷰팀이 성공회 대성당 앞에서 순대국도 먹었어요. 암환자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인데, 우리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느라고 순대국을 드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고인께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가 마지막 인터뷰라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직후, 일간지에도 이 인터뷰 내용이 소개됐고, 신영복 유고집에도 전재가 되었습니다. <다들>이 가장 먼저 한 인터뷰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지요. <다들> 멘토 인터뷰의 큰 방향이 이미 그때 신영복 선생 인터뷰 때 정해진 셈이지요.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인 인터뷰였습니다.

 

웹진 <다들>이 창간한 게 2015년인데, 당시 종이 잡지가 아닌 웹진을 만들자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평생교육이 꽤 대중화되고 외연이 넓어지긴 했지만 저는 우리 사회 평생교육이 당시까지만해도 제한된 사람들의 자기 잔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평생교육을 평범한 보통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요. 바로 그래서 홍보 업무를 맡은 스탭들을 불러모아 놓고 진흥원과 평범한 보통 시민들 사이에 작은 창이라도 하나 내고 아름다운 소통을 시작하자고 주문했지요. 다만 디지털 시대의 창이니 만큼 디지털 무기와 결합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웹매거진 형태였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덧붙였습니다. 당시 김혜영 팀장, 황미연 과장, 전아림 주임 등 원년 스태프들이 정확하게 제 말의 뜻을 알아듣고 한 달 만에 ‘다들’이라는 웹진의 이름을 집단창작해 왔지요. “서울 시민 모두 다에게 정보의 너른 들판을 제공하겠다”는 그런 뜻이라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맵시있고 섹시한 제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 이거 되겠다, 전조가 좋다!”, 이런 느낌이었지요.

 

<다들>이 이렇게 장수하리라 예상하셨나요?

저는 이 방면에 반쯤 선수여서 대충 내다봤지요(웃음). 창간되기 전부터 대한민국 최고의 웹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평생교육계에서는 으뜸가는 잡지가 됐고, 50%의 성공을 달성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제 가슴에 남아있는 50% 정도의 빈 공간은 아직 채우지 못했어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채워가야지요.

 

저희는 김연아, 장미란 선수 같은 인터뷰이를 멘토 코너에 초대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발행인께서는 아쉬운 섭외가 없었는지요?

우리가 신생 매체였고, 출범 직후의 공공기관인데다 평생교육기관치고는 작은 기관이었지요. 그 정도 기관의 섭외력으로는 90점 이상의 섭외가 된 거예요. 그건 전적으로 김혜영 팀장을 비롯한 우리 편집 실무자들의 저돌적인 힘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 대상을 섭외할 때 편집 실무진들한테 “대통령 빼고 그 어떤 사람도 우리 <다들>이 만나 인터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섭외하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1~2년 지나고서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그렇게 섭외되고 인터뷰를 내보낸 사람들이 다시 섭외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매체의 섭외력이란 게 그런 식으로 생기는 것이거든요. 저는 그걸 우리 실무진들에게 가르쳐준 게 큰 보람이었구요. 저희 정도의 공공기관이면 섭외가 안 되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데도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건 제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낸 실무자들이 그냥 막, 어떻게 보면 깡패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붙인 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양아치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일

 

만나서 제일 반가웠던 분은 누구였나요?

김우창 교수님? 인터뷰할 때가 2016년이었는데, 그때도 이미 80대 중반이셨지요. 휴대폰이 없는 분이라 집으로 전화를 해 약속을 잡았지요. 인터뷰를 잘 안 하시는 분인데 많은 얘기를 저희들한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사람은 김제동인데, 편집진 내부에서 일부 반대가 있었어요. 김제동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멘토나 스승이냐? 그때 제가 “김제동의 지명도가 멘토”,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0김제동이 사는 서래마을 근처의 단골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서래마을을 부유하는 양아치 같은 차림으로 나타났어요. “평생교육을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는 “평생 양아치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일”이라고 해서 속으로 놀랐어요. 그거 들으면서 제목 나왔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반대가 있었어요. 점잖은 웹진의 머릿기사로 ‘양아치’라는 표현을 어떻게 쓰냐고. 그래서 결국은 바꿨어요. ‘평생 자기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일’로. 제가 그 자기검열을 제일 후회합니다. 혼이 사라진 제목이 되어버렸어요. ‘평생 양아치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일’과 ‘평생 자기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일’의 어감 차이가 얼마나 커요? 자기 검열에 걸려 그 문장과 그 말의 힘을 빼버린 것에 후회가 막급이에요. 허허. 김제동 씨한테도 미안하고.

 

김제동 씨 얘기를 하니까 같은 방송인 강유미 씨도 생각나는데, 발행인께 강유미 씨는 조금 낯선 인터뷰이 아니었나요? 

강유미는 조금 색다른 인터뷰이였지요. 저는 크게 대수롭잖게 생각했고, 젊은 여성 인터뷰이가 필요하다고 해서 했는데, 만나보니까 만만한 연기자가 아니더군요. 속이 꽉 차 있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더군요. 난 강유미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말에 조리도 있고, 자기 아이덴티티가 강한 사람이고, 예인으로서 개그맨으로서 자기 자긍심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남았습니다.

 

거의 서울에서 인터뷰했지만 최재천, 김용택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아주 먼 곳까지 가기도 했지요?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에 우리가 거의 다섯 시간 차를 타고 갔더니 최재천 선생이 “오지까지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아니, 여기가 왜 오지냐?” 그랬더니 “요즘은 부산, 목포도 두시간 반, 많이 걸려야 세 시간이면 간다. 제주도 1시간 반이면 가는데 다섯 시간 걸리는 데가 어딨냐? 그러니 여기가 오지 아니냐”고 하더군요. 사실은 김용택 시인 집도 거의 다섯 시간 걸렸지요. 전북 임실군 덕치마을, 거기도 고속도로가 안 닿는 곳입니다. 이렇게 두 분을 오지까지 가서 만났고, 오지까지 가서 만난 덕을 톡톡하게 봤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아주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최재천 원장도 다음 일정을 미뤄가면서까지 영양가 있는 말씀을 많이 들려주었구요.

 

 

서울시 기관장들이 부러워한 박원순 시장 인터뷰

 

박원순 시장님 인터뷰 때 방에서 바인더 찾기 하셨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박원순 시장님이 2016년 1월에 신년 인터뷰를 했어요. 진흥원이 출범하고 해가 바뀌고 신년 인터뷰를 한 건데, 그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 서울시 기관장 회의에 갔더니 기관장들이 다들 부러워 했어요. 제일 작은 기관의 실무자들이 시장실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그랬으니까. 하하.

시장님이 이것 때문에 거의 1시간 반~ 2시간을 내줬고, 시장실에도 들어갔던 전례 없는 인터뷰가 됐지요. 아마 이건 박원순 시장님이 평생교육에 대한 이해의 폭이 크니까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덕분에 시청 평생교육과 주무관들까지도 시장실에서 시장님의 평생교육 철학을 듣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됐지요.

시장실 사방벽에 바인더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시장님이 “웰빙 말고 웰다잉도 해야 되지요. 잘 사는 법을 강의하려면 그 옆에 잘 죽는 법도 강의해야 됩니다. 웰다잉에 대한 자료 찾아볼까요?” 하시더니 옆으로 가서 ‘웰다잉’이라고 쓰인 바인더를 척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때 속으로 “서울 시장,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하하.

 

멘토에서 만난 젊은 분들 중 기억에 남는 분은 어떤 분인가요?

나효우 대표는 지명도는 덜한데 인터뷰가 아주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여행이 학습이 되는구나 싶었고, 이야기들이 딱 떨어지더라구요. 나중에 물어봤더니 여행 업계에선 아주 유명한 사람이더군요. 색다른 여행으로 비즈니스도 하고. 난 나효우 대표를 전혀 몰랐는데 김혜영 팀장이 추천해서 하게 되었지요. 젊은 사람이 멘토가 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정신을 이끌 수 있다는 걸 나효우 대표를 보고 확인하게 됐어요.

 

 

<다들> 시즌2에선 담론을 주도하자

 

<다들>에 아쉬운 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건가요?

평생교육계를 리딩할 수 있는 담론주도성이 좀 떨어진달까? “이런 게 현재 평생교육에선 아젠다다, 새로운 현안이다” 하는 걸 던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교육법 개정할 때 웹진 특별호를 냈습니다. 첫 특별호가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진흥원 이사이시기도 한 평생교육학회 이희수 회장님이 극찬을 했지요. “역시 가장 핫한 담론을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발언을 해야 할 사람을 모아놓고 했다”, 그렇게 칭찬을 하시더군요. 특별호 낼 때, 그땐 정말 얼마나 큰 고생이었어요? 다른 일 하기도 바쁜데 다들 새벽 조찬으로 모아놓고, 사진 다 찍어서, 좌담 하자마자 바로 풀어가지고 편집하고…. <다들>의 담론주도성을 그렇게 특별호 제작을 통해 더러 담보했는데, 그 뒤로 특별호를 두어 번 더 내고는 더 이상 내지 못했지요. 우리가 그간 게을러진 거야. 내가 이거 한번 해보자 제안을 하고 싶었는데, 일들이 많고 정신이 없으니까 내가 주장을 할 수가 있나. 지금 생각해보면 쥐어짜면 되거든. 할 수 있는데, 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해버려 놓친 겁니다. 하하. 우리가 호외를 세 번 냈어요. 평생교육법 개정, 서울 평생학습 대토론회 평가, 시도진흥원협의회 정책 제안 좌담, 사실 그게 전부 평생교육 현황과 담론 주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웹진이 대중적으로 읽히는 매거진이 돼야 된다는 기본 전제 때문에 읽히기 어려운 담론 주도성 기사는 많이 자제를 한 셈입니다. 대신 평생교육의 현황을 소개하고 화제가 되는 일을 알리는 기사를 중심으로 제작했지요. 나는 지금도 웹진 본체는 그렇게 해서 대중의 가슴 속으로 꽂히고, 필요한 담론 주도성은 호외, 특별호로 가면서 이슈파이팅을 해주고, 이 2개가 같이 가야 된다고 봅니다. 최소한 분기에 한 번씩은 웹진 호외를 발행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런 일은 늘 생기거든.

서울평생교육진흥원의 웹진 호외를 보면 지금 평생교육의 현안이 뭐고 담론이 뭔지를 알 수 있게, 이때쯤 웹진 호외가 나오겠다고 독자들이 기다려질 정도로 만들여야 하고, 지금쯤은 그럴 역량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할 수 있고,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다들> 창간 이후 평생교육계에 웹진도 많아졌고, 인터뷰도 활성화된 것 같아요.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될까요? 멘토 인터뷰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가 스태프들한테 늘 얘기 했다시피 특정 매체에서 특정한 포맷을 2년 이상 가져가면 안돼요. 바꿔줘야 됩니다. 우리가 사실은 교체시기가 좀 늦은 겁니다. 봄여름가을겨울 한 순배가 두 번 반복될 때까진 몰라도 세 번 반복되면 사람들이 지리함을 느끼지요. 우리가 적시에 바꿔주지 못한 건 덜 냉정해지고, 웹진을 개편하고 혁신해야 된다는 우리의 의지가 미달된 때문이지요. 물론 변명하자면 다른 사업이 바쁘다보니 그런데, 사실은 적절하게 개편을 해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겨우 그 개편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 만큼 웹진에서 멘토 인터뷰가 막을 내리는 걸 계기로 늦더라도 웹진 <다들> 시즌2를 새롭게 여는, 전체적으로 한번 포맷과 디자인과 구성을 바꾸는 근원적인 검토를 내부에서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계절이 열리는 5월부터 전혀 새로운 개편을 해봅시다. 아젠다 세팅하는 기능과 뉴스를 전하는 기능을 투 트랙으로 해서, 우리를 세상에 알리는 창으로 만들어보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홍세화의 개똥 세 개 이야기

 

원장님은 최근 전국 각지를 돌며 “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진행했던 멘토 인터뷰의 공부 이야기를 전하고 계시는데, 청중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최근 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 조직인 새마을운동중앙회 직속 새마을연수원에 가서 전국의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을 상대로 연속 6회째 강연 중입니다. 매회 300~500명씩, 전국에서 오신 분들을 앞에 두고 ‘어느 도시 이야기’와 ‘우리시대의 멘토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의외로 이분들이 멘토 이야기에 열광을 합니다. 왜? 그냥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이야기를 해줬으면 아마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꽤 유명한 사람들의 평생에 걸친 공부 이야기를 해주면 그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거예요.

김용택 시인의 엄마가 늘 하던 이야기가 “사람이 그러면 못써”인데, 서재의 그 많은 책들의 내용을 한줄로 줄이면 “사람이 그러면 안돼”, 바로 그것이라는 이야기에 환호합니다. 특히 환호하는 이야기는 홍세화 선생이 외할아버지한테 들었다는 개똥 세 개 이야기예요. 첫 번째 개똥은 용기도 없으면서 장군이 되겠다는 큰 형님한테 먹이고 싶고, 두 번째 개똥은 맨날 뺀질뺀질 놀면서 대학자가 되겠다는 둘째 형에게 먹이고 싶고, 세 번째 얘기를 안 하니까 훈장이 “어떻게 할래?” 윽박지르자 “당신에게 먹이고 싶다,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당신에게 먹이고 싶다”고 했다는데까지 얘기를 하고,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어린 홍세화를 앉혀두고 “세화 네가 앞으로 살면서 마지막 개똥이 훈장 몫인 걸 알면서도 그 얘기를 못하면 그 마지막 개똥은 네가 먹어야 된다”고 했다며, 자기가 일생을 살아온 것은 어떻게 하면 그 세 번째 개똥을 덜 먹을까 하면서 피투성이로 살아온 생이었다고 얘기를 하면, 전부 숙연해지지요. 인터뷰 마지막에 “홍세화가 생각하는 평생학습은 뭡니까?” 물어보니 ‘평생 동안 나를 짓는 일이다’ 하면서, 우리가 ‘옷을 짓다, 밥을 짓다, 집을 짓다’라고 의식주 3개 전체에 ‘짓다’라는 말을 쓰는데, 세계적으로 그런 표현이 없다고 해요. 그런 얘기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얘기들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김용택 시인에게 김용택 생가를 묻는 사람들

 

그러고 보니 많이 언급을 했네요. 쭉 한번 훑어봅시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하고는 여의도에 있는 호남 한정식집에서 한정식 성찬을 앞두고 인터뷰를 했지요. 그 양반이 젊은 사람이 엄청 미식가예요. 그래서 밥 같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했지요.

이순재 선생은 정말 사회적으로 충분히 존경에 값하는 사람이라는 걸 피부로 느꼈어요. 거짓이 없고, 아주 치열하게 생을 사는 성실한 느낌, 참 성실하고 건강한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기억하지요? 조정래 작가 신년 인터뷰하러 댁으로 갔을 때, 밖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문을 턱 여니까 인터뷰하러 온다고 하얀 무명옷을 입고 우리를 기다려주시던 그 모습. 우리시대 대 작가가 우리를 기다려줬고, 작은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대작가연하지 않고 두 시간 동안 성실하게 얘기를 해주셨지요. 평생교육이 뭐냐니까 손자들하고 대화가 되는 할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김용택 시인 본가에 가서는, 커피를 마시고 새로 지은 서재에서 나와서 김 시인하고 걸어가는데, 대학생들인 듯한 남녀 다섯명이 쪼로록 와가지고 김용택 시인한테 “여기 김용택 생가가 어디에요?”라고 묻더라구. 덕치마을 들어가는데 현판이 서 있잖아. ‘여기서부터 몇 킬로미터. 김용택 시인 생가’라고 임실군에서 현판을 세워줬지요. 관광상품으로 그걸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대학생들이 그렇게 물으니까 김용택 씨 왈, “제가 긴대요.” 하더라구요. 하하하하.

 

그날 찍은 사진도 너무 예쁘더라구요. 꽃도 있고, 풍경도 그렇고. 이근원 작가는 평소 인터뷰 사진만 찍는데 그날은 신나서 꽃도 찍고 풍경도 찍고 그러셨죠. 또 어떤 인터뷰이가 생각나세요?

이수정 교수. 뭐 나도 내로라하는, 지명도 있는 여성분들 많이 만났는데, 이수정 교수는 단단한 사람 같았어요. 우리 시대의 프로파일러, 범죄심리학자의 중요한 전범이에요. 군더더기가 없고 잡념이 없고, 자기가 하는 일에 완벽한 자기 구현이 되는, 안이 꽉 차 있고 묵묵히 자기 일에 열중하는 사람. 그날 이후로 이수정 교수를 좋아하기로 했어요. 범죄심리학자가 된 계기가 아마 강간범들을 감옥 안에 들어가서 심리상담 하라고 법무부에서 내려온 오더를 받아서… 그 남성들의 벽을 뚫고 들어가야 강간범들의 심리를 여성의 입장에서 포착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성공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자기가 맞닥뜨린 절벽과 협곡을 피투성이로 헤쳐나오면서 그게 온 몸에 탁 새겨진 사람이에요.

 

새마을운동과 평생학습의 만남

 

정성헌 회장은 고대 정외과 출신인데 감옥을 세 번 살았어요. 반 박정희 운동을 엄청나게 한 사람인데 세월이 지나서 박정희의 가장 큰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접수한 거지. 그 40~50년의 세월 동안 이 분은 진보 운동가에서 생명과 생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지요. 인터뷰를 하면서 “이념이 밥 먹여주냐? 실용이 밥 먹여주지.” 보수와 진보 전체를 질책하면서 새로운 실용을 제시하는 정 회장을 보면서 막힌 게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최근에 성남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서 강의를 몇 번 했어요. 새마을지도자들을 위한 3박4일간의 합숙 연수인데, 제일 마지막 강의를 맡았지요. “어떤 운동이라는 것도 학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목표를 공유하고 이론이 생기고 사람이 움직인다. 새마을운동과 평생교육을 포개자. 지금 평생학습에서 가장 큰 조직적 결함이 읍면동 단위까지 네트워크가 안 되어 있다는 점인데, 당신들은 그걸 다 가지고 있지 않냐? 이걸 포갭시다, 이걸 접목시킵니다.” 그런 내용이에요. 그게 끝나고 사람들이 저한테 찾아오고 있어요. 경북 봉화에서 새마을운동 하는 사람인데 평생학습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새마을운동중앙회와 MOU를 맺어가지고 지역별로 지역평생교육진흥원과 연결시켜주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 기회를 갖게 된 데도 정성헌 회장의 역할이 큽니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인터뷰가 많았어요. 채현국, 김우창, 김성수, 강만길 선생 등.

아무래도 우리 시대의 어른, 우리 시대의 스승을 찾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요. 그 중 최고령은 김성수 주교입니다. 김성수 촌장 인터뷰가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마음이 숙연해지요. 이 분은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분이고, 내가 언젠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요.

 

저희 사실 김 주교님 인터뷰 끝나고 오면서 반성 되게 많이 했잖아요. 이렇게 살지 말자고 간증하고. 종교를 바꿔야겠다, 성공회로. 그런 이야기까지 했어요. 후원한다 해놓고서 아직 못했네요. 

나는 후원했어. 정기적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작은 돈이지만.

강만길 선생도 1935년생으로 나이가 많으십니다. 강원도 양양에 혼자 사시는데, 집에서 자식들이 안 내려오고 자기가 두 달에 한 번씩 집으로 간다는 거야. 바다 보고 살면 세상 편하다며, 노인네들이 먹을 거 마트에 다 있다면서 세상 편하다고 말씀하셔요. 이 분이 한국 근대사의 최고봉인데, 그날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한국 현대사의 최고봉인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를 우연히 만나 같이 함께 밥을 먹는 엄청난 우연을 만나기도 했지요. 막걸리도 한 사발 하고. 참 여러 에피소드가 많아요.

이유정 작가가 그 동안 초벌 정리하느라 수고했고, 이근원 작가도 사진을 진지하게 잘 찍어줘서 고마워요. 초기부터 조합이 잘 되었던 거 같아요. <다들> 멘토 인터뷰 만드느라고, 다들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김영철은 누구인가?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원장 겸 전국평생학습연석회의(전평연) 상임대표, 전국시도평생교육진흥원협의회 고문.

언론인으로 오래 일하다 2015년부터 서울 진흥원 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평생학습을 화두로 대전환기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창조적 변화의 새 길을 모색하는 데 열정을 바치고 있다. 2017년, 전국 단위 평생교육 기관·단체 및 주요 인사들의 상설 회의체인 ‘전국평생학습연석회의(전평연)’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