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토록 매력적인 그림책이 많았다니!

 

서울자유시민대학은 올해 ‘서울시민, 생애주기별 고민을 평생학습으로 풀다’를 주제로 청년층과 중장년층, 시니어의 나이대에 맞는 프로그램을 공모받아 총 16곳에 민간연계 시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비영리 기관, 법인, 단체 등과 연계하여 우수 평생학습 콘텐츠를 발굴하고 육성하자는 취지다.

그 중 한곳인 강남구립 못골도서관에서 시니어 대상의 ‘그림책, 어른을 말하다’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이미 지난 1기에서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소문이 퍼져, 여름에 시작하는 2기는 수강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경쟁을 뚫고 수강생이 된 사람들 중에는 시니어도 있지만, 아기엄마 또래의 여성들도 많았다.

 

 

진짜 나이 들어 좋은가요?

네이버카페 제이그림책포럼을 운영하는 전은주 강사님은 30년 전 졸업한 출신학교와 15년 전 그만 둔 방송작가 경력이 소개되자 현재의 자신은 전업주부이며 하루 중 네이버 댓글 다는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정정했다. 지금의 나도 충분한데, 과거의 나가 여전히 지금의 나를 소개하는데 쓰이는 걸 보면 이걸로는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1기 때 시니어들도 과거 경력으로 자기소개 하는 걸 보며, 과거를 소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책상 가득 수십권의 그림책을 깔아놓고 강의를 시작한 강사님은 조금 늦는 수강생들을 기다리는 5분 동안에도 그림책 한권을 통째로 소개해줄 정도로 그림책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가져온 그림책들도 하나같이 흥미진진했다.

‘그림책을 읽으면 뭐가 좋을까?’ ‘그림책, 어떻게 읽을까?’라는 두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했는데, 많은 그림책을 이 주제와 연결시켜 소개하느라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벽 너머를 보기 위해서다. 벽 너머를 보기 위해서는 책도 필요하지만 나이(경험과 연륜)와 공동체(이웃 혹은 관계)의 힘도 필요하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강사님이 소개해주신 수많은 그림책 중 마음에 들었던 몇권을 사진과 함께 소개해 본다.

 

 

<울음소리>

긴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은 책을 스네이크북(snake book)이라고 한다. 이 책은 박스 케이스에 들어있는 스네이크북이다. 책을 상자에서 꺼내야 하고, 껌껌한 그림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는 구조라 쉽게 읽기 힘들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책이다. 왜 이렇게 접근성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제작했을까? 강사님은 책을 읽는 방식 자체가 아동학대에 접근하는 방식과 닮았다고 했다. 가정폭력도 귀 기울여 예민하게 보지 않으면 모른 채 지나치기 쉽다. 그런 의도까지 넣어 세심하게 제작된, 책을 보는 방식이 주제와 맞닿아 있는 책이다.

 

<눈 깜짝할 사이>

같은 그림이 2장씩 들어있는 이 그림책은, 바로 그런 이유로 느리게 보게 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순간을 그냥 쓱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마지막에 반전이 있는데, 그 반전을 보고 “아…” 탄식하는 사람들은 인생이 눈 깜짝할 사이라는 걸 체감하는 나이의 사람들이다.

강사님이 초등학생 아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고 느낌을 물었더니 “우와…마법의 홍차야?”라고 했다고.
고등학생 딸은 “뭔 말인지는 알겠지만 와 닿지는 않아. 나에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만 눈 깜짝 할 사이야.”라고 했다고. 반면 지난 강의를 들은 시니어 한 분은 맨 마지막에 눈 뜨는 연필드로잉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서야 눈을 떴다”는 의미를 읽어냈다고 한다. 나이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달라지는 책이다.

 

<혼나지 않게 해주세요> VS <눈 내리는 하굣길>

동생들을 돌봐야했던 첫째들이라면 <혼나지 않게 해주세요>에 감정이입할 것이고, 형이나 언니에게 치이기만 했던 동생들이라면 <눈 내리는 하굣길>에 격하게 공감할 것이다. 잘 놀다가도 엄마만 오면 다시 울기 시작하는 동생이 얄미웠던 기억, 자기는 힘들게 눈길 해치고 왔는데 약삭빠른 형은 엄마에게 돈 얻어 택시타고 왔다는 걸 알게된 때의 억울함 같은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혼나지 않게 해주세요>를 읽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이 아이에게는 안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담치료가 권장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안아주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행동치료가 필요하다는 전문가적인 진단을 내린 것. 역시 서있는 자리가 다르면 읽어내는 것도 다르다.

 

<리본>

이 책은 가름끈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일반책의 가름끈이 위에 달려있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아래쪽에 달려 있는데, 그 노란 끈이 공중곡예사의 줄이 되었다가 세우면 낚시줄이 되고, 큰 뱀의 혀가 되었다가 작은 뱀의 몸뚱아리가 되기도 한다. 신발끈에서 끊어진 그네줄까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변화무상하게 움직이는 가름끈을 보면, 작가의 창의성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어쩐지 가름끈을 움직이며 이 책을 보는 나의 창의성도 1%는 올라갈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가드를 올리고>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라고 한다. 링 위에서 맞으면서 쓰러져도 또 일어나는 복서의 이야기인데, 링에 오르는 걸 ‘산에 오른다’고 비유한다. 연필로 부분을 확대해서 거칠게 그린 그림도 멋있지만, 쉽지 않은 인생을 사는 어른들에게 산 위의 진짜 바람이 아니어도, 솔솔 부는 작은 바람이어도 괜찮다는 내용이 큰 위로가 된다.

강사님은 남자들이 좋아한다지만 여자들도 가드를 올리고 살아야 할 때가 얼마나 많으냐며 남녀 공히 인생을 좀 아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의 엄마>

일반적인 책들이 가로 띠지를 두르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세로 띠지를 둘렀다. 표지에 띠지를 두르면 늙은 엄마와 젊은 딸이 손을 잡고 있는데, 띠지를 벗기면 어린 딸과 젊은 엄마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으로 변신한다. 이 띠지 덕분에 책을 사서 소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책에는 오로지 ‘엄마’라는 글자 밖에 안 나온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엄마’가 얼마나 다양한 억양으로 불리는지 느끼게 된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불렀던 ‘엄마’가, 앙칼진 ‘엄마’로 바뀌었다가 끝내는 불려지지 않는 세월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첫사랑>

같은 책이 소프트커버의 어른용과 하드커버의 어린이용으로 나와 있다. 어른용은 세종도서 다양성 부문에 추천되었으나 어린이 도서는 추천되지 않았다고 한다. 내용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다만 책크기와 커버 재질이 다를 뿐. 성소수자의 어린 시절 얘기는 아직 어린이에게 읽히면 안된다는 철통같은 생각은 언제쯤에나 바뀔까?

 

<리틀맨>

이 책은 뉴욕에 사는 흑인 소년을 주인공으로, 매 페이지가 섬세한 페이퍼컷팅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림책이라기 보단 한권의 예술작품을 보는 느낌이다. 강사님 왈 “이런 그림책이야말로 자식 사준다는 미명 하에 사서는 부모가 욕구충족하는 책이죠. 정작 자식에게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멀리서 떨어져 보라고 하는 책이죠.”라고 했다. 정말 누군가 잘못 만져 찢기라도 한다면 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섬세한 책이다.

짧고, 글자가 크고, 쉽지만 마음에 훅 들어오는 그림책의 매력에 풍덩 빠졌다 나온 두 시간이었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는 책이 아니라 각자의 나이와 관점에서 다양하게 읽혀지고, 매번 펴서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강의 듣고 오는 길에 나는 이미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몇 권을 주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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