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 그렇게 훅 가버렸다

 

청년인생설계학교엔 ‘잘 먹고, 잘 쉬고, 잘 만나자’가 목표인 프로그램이 있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이냐, 새벽종이 울리면 일어나 새마을을 열심히 가꾸자며 대국민 운동까지 했던 부지런한 민족이다. 그런데 여기선 그저 쉬는 게 전부란다. 이름도 희한하다. <청년요양원>. 지리산 자락 산청군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휴대전화 없이 2박 3일 동안 잘 차린 프로그램과 밥상, 따뜻한 돌봄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7월 16일부터 이틀을 참여자인양 한 자리를 차지해 꼬깃꼬깃한 수첩과 카메라를 쥐고 참여했다.

 

 

7월 16일 12:20~13:00

<청년요양원>을 운영하는 ‘교육기획 언니네 책방’은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떠나기 전 챙겨야 할 것을 살뜰히 알려주고, 내려오는 길에 들을 노래까지 선곡해 주었다. 들뜬 마음으로 멜로디와 가사가 쏙쏙 들어온다. 장필순의 <탈출>, 나에게 딱 맞는 노래다. 탈출~!!

요양하러 가는데, 일 때문에 간다니. 넌센스다.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 못다 한 일들이 머릿속에 가득하고, 웹진에 글을 써야 한다는 것도 솔직히 부담이다. (보고 있나 편집자?) 글감 찾기가 어려워 우선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최근 휴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여행 : 막상 떠나니 즐겁게 지내긴 했다만, 떠나기 전 어딜 가야 할지 맛집은 어딘지 열심히 찾았더랬다. 인스타그램에 #OO맛집이라고 치니 음식점이 수두룩하게 떴다. 광고 공해 속 진짜 맛집을 골라내느라 애썼다.
방콕 : 집에서 더 바쁜 나란 인간. 집에 있으면 할 일이 더 많다. 쓸고 닦고 무언가 해 먹고 빨래하고.

요샌 쉰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쉬기 위해 에너지를 쏟는달까. 그러니 쉬고 난 후에 더 피곤하다. 그럼 이게 정말 쉬는 걸까? 꼬리를 물며 늘어지는 생각을 접고, 휴대전화와 헤어질 준비를 하는 차원에서 족히 네 시간은 끼고 있던 에어팟을 뺐다. 벌써 귀가 심심하다.

 

7월 16일 13:50~16:00

이곳에 오면 휴대전화를 반납하는 것이 규칙이다.
반납한 휴대전화는 보냉백에 담겨 신선하게 보관된다.

터미널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 차 안이 적막하다. 재빠르게 친구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내가 죽으면, 사인은 어색사다.’

도착하자마자 푸짐한 밥상으로 시장한 속을 달랬다. 천문대 지기인 ‘별아띠’님과, 그의 반려자 ‘들국화’님. 들국화님은 분홍색 챙이 넓은 모자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분홍색 뺨을 가진 분이다. 들국화님이 정성껏 차려주신 찬이 너무 맛있어 한 그릇을 금방 비워냈다. 일정 내내 사육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들국화님이 직접 말려 만든 국화차(추정)를 곁들였다. 내 입에는 썼지만 다들 맛있게 마셨다. 탁 트인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처음 봤다.

 

7월 16일 16:00~17:30

서로 낯도 익힐 겸, 첫 소일거리를 할 겸 샹그리아를 만들었다. 과일을 씻고 자르고 와인을 붓는 단순한 과정이지만 몰입하게 된다. 웃고 떠들다 보니 핸드폰을 냈다는 걸 깜빡 잊었다. 마무리하고 산책을 나섰다.

핸드폰 없이 걸으니 각자 다른 모습을 한 풀과 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옆집엔 오랜만에 보는 대우 마티즈가 있다. 어떤 집은 꽃이 참 다양하다. 수국은 꺾여 포장지에 싸인 것만 봐 왔는데, 땅에 붙어있는 건 처음 봤다. 나도 꼭 이렇게 도시 촌년티를 낸다. 마을의 집들은 각자 모양이 달라 보는 재미가 있다.

도영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동네 한 바퀴 구경이 끝났다.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땀이 한 가득이다. 도착해 화장실에 들렀다 오는 길에 방 안에 앉아있던 S와 눈이 마주쳤다. 웃으며 손을 흔드니 마주 웃어준다. 벌써 우리가 서로 아는 사람 범주에 들어선 것 같다.

 

7월 16일 17:40~20:00

복숭아화채. 복숭아를 잘게 썰고 설탕물에 넣어 얼린다. 너무 꽁꽁 얼어 오렌지맛 환타를 부어 녹였다. 의외로 맛있어 서로 연거푸 퍼 주었다. 둘러 앉아 산책의 열기를 식히고 있던 차에 귀가 심심해 음악을 청했다. Y가 기타를 잡으니 하나 둘씩 둘러앉는다. 근사한 목소리로 노래를 곧잘 한다. 병훈도 이어받아 노래를 했다. 김광석의 <기다려줘>.

밥을 먹었다(또). 묵은지가 맛있어 더 퍼놓고, 짜니까 밥을 더 퍼먹고, 모자라서 묵은지를 더 퍼먹고… 과식에 죄책감을 느껴 혼자 길을 나섰다. 길을 걷다 문득, 매사에 자꾸 의미 부여하는 것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좋고, 눈에 보이는 것이 예쁘면 그만이다. 모든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게 꼭 대단할 수는 없다. 또 대단한 게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마을 중학교 뒤 공터에서 바람 빠진 공을 발견했다. 골키퍼 없는데도 골이 안 들어간다. 두 번 왕복하고 골을 넣었다. 스스로 대견해 하며 공터를 나와 걷는데, 웬 벌이 머리 위를 계속 맴돈다. 피해 보겠다고 전력 질주를 했더니 체력이 바닥났다.

돌아오니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에서 도망치고 싶어 온 S. 뉴욕에서 일주일 전에 온 H. 좋아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아 머리가 복잡한 Y.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S. 한 직장을 오래 다닌 탓에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은 때가 온 H. 각자 소개를 마치고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지켜보니 다들 즐겁고 부쩍 친해진 것 같아 내가 다 좋았다.

 

7월 16일 21:00~22:30

별을 봤다. 이곳은 누워 있으면 천장이 열리는 천문대다.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을 기대했지만 야속한 구름만 가득하다. 그래도 지붕이 열릴 때 탁 트이는 느낌은 특별하다. 달이 밝으면 별이 어둡다는데 오늘은 달이 밝다. 그래도 구름이 비켜준 틈을 타 목성과 토성을 관찰했다. 또! 주전부리가 나온다. 이제는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망설임 없이 화채를 들이킨다. 누워 밤공기를 즐기는 사람, 자두를 깨무는 사람, 쪼르르 줄을 서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는 사람들. 첫사랑 얘기 듣기를 좋아한다는 Y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첫사랑 얘기를 묻고 있다. 내 첫사랑도 물었다. 가족이라고 답했다.(진짜니까)

언니네 책방에서 사식으로 넣어준 맥주 한 캔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방에 와보니 못 보던 플랜카드가 붙어 있다. 너무 귀여워 혼자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다. 잠자리를 펴고 난 뒤 허전해서 가방을 뒤졌다.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찾고 있던 모양이다. 종일 잊고 살았는데 자려고 하니 이제야 실감난다. 아쉬운 대로 가져간 책을 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이 몰려와 그냥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를 정리해본다. 디톡스 같은 하루라고 생각했다.

 

7월 17일 09:40~13:00

아무래도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난 것 같다. 부랴부랴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은 게 참 오랜만이다. 먹고 난 뒤 어진과 파라솔 밑에 앉아 고양이를 구경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동네를 한 바퀴 걷고 꽃이며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드림캐쳐를 만들 거라 한다.

구경하다 Y 옆에 붙어 앉았다. 첫사랑 얘기를 핑계 삼아 평범한 개인들의 특별한 이야기 듣는 것이 좋다고 한다. 퇴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어차피 뭘 해도 불안하고 힘든 바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자고 마음먹었단다. 옆에 있던 나은이 붙었다. 나은은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역할 변화에 대한 고민,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 세대 간 차이… 이야기가 끝도 없이 번진다. 소일거리를 금방 끝낸 한량의 옆으로 앉았다. 어제 자기소개 할 때 보니 캠프를 좋아한다던데, 왜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익명성에 파묻히니까’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곳의 사람들은 본인을 모르니, 새롭게 지내는 점이 좋은 것 같다면서. 그러면서 이런 걸 궁금해 하는 내가 신기하다고 한다. 생각치도 못한 대답을 들려준 본인이 더 신기한데.

 

7월 17일 14:30~17:30

점심을 먹고, 도영과 방에 앉아 긴 수다를 떨었다. 하고 있는 고민과 생각이 비슷해 서로의 얘기에 계속 맞장구를 치니 한 시간쯤 훌쩍 갔다. 우리가 수다를 떠는 동안 나머지 사람 중 절반은 물놀이를 갔고, 절반은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기에 들여다보러 갔다. 시를 쓰고, 퍼즐을 맞추고, 드림캐쳐를 마저 완성하고, 누워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물놀이에서 돌아온 병훈이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고, 그런 우리 모습을 스케치하는 Y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헤어질 시간이 왔고, 내가 떠나는 차에 모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틀이 그렇게 훅 가버렸다.
쌓인 메시지와 속세(?)의 소식을 확인하곤 곧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허하지가 않다. 분명 일로 왔는데, 신기하게도 에너지가 소진된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다.

와서 물어보니 각자 쉬는 방법도, 쉼에 대한 정의도 달랐다. 그런데 다들 쉬기는 쉰다. 쉴 때 뭐하세요? 라고 물으니 한 명도 주저하는 사람이 없다. 나도 굳이 복잡하게 꼬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청년요양원>에서 처럼 잘 먹고, 나를 잘 돌봐야지.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해줘야지. 그게 쉬는 거지 뭐.

그런데 쉬면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아직 사람들에게 못 물어봤다. 아무래도 그거까지는 물어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또 가겠다는 핑계거리를 이렇게 만들어 본다.

 

저, 가을에 또 가도 되나요? 보내주세요, 제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싶은 청년들을 위한
서울형 갭이어(Gap-year) 프로젝트로, 2017년 서울청년의회의 정책 제안으로 탄생했다.
혼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폭 넓은 경험, 평소 생각하기 어려웠던 나와 세상을 향한
탐구,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또래와 만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어느덧 2019년도 절반이 지나 여름이 찾아왔고, 2019년 청년인생설계학교도 열기를 띠며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무더운 여름, 이열치열이라는 옛말처럼 올해 여름 2019년 청년인생설계학교 여름학기에 참석해 뜨거운 여름을 보낼 준비가 된 청춘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