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세상과 연결하는 제너럴리스트

 

정재권 서울자유시민대학장은 28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이 인터뷰를 위한 사전 설문지를 받아든 지난 주말, 정 학장은 먼저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 묻는 게 직업이었는데, 이렇게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되니 질문에 답해야 했던 그들의 심적 부담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주말 동안 신임 학장으로서 서울자유시민대학(이하 시민대학)에 대한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볼 수 있었다는 정 학장은, 인터뷰 내내 준비된 답을 내놓았다. 그 탓에 인터뷰의 돌발적 재미는 덜했지만, 매 답변마다 곱씹고 새겨들을만한 화두가 있었다. 이날 인터뷰어로는 김종선 시민대학국장, 박미경 시민대학운영팀장, 이상훈 시민대학사업팀장이 참여했다.

 

 

 

김종선 : 시민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신 지 2주 정도 되었는데, 실제 시민대학 현장에 들어와서 보시니 밖에 계실 때와 어떤 점이 달랐나요?

정재권 : 의례적인 대답일 수도 있는데, 시민대학 강좌를 살펴보니 폭이 넓고 깊이가 있어서 많이 놀랐습니다. 이번에 시작한 본부 가을학기 강좌만 해도 <천년의 역사 러시아 예술 그 위대한 순간들>, <콘크리트 유토피아 – 서울주거 이야기>, <우리의 근대를 돌아보다 : 1860~1900년대 초의 사유와 실천> 등 제목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강좌들이 많더라구요. 시민대학에 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28개 대학과 함께하는 ‘대학 연계 시민대학’, ‘기업 연계 시민대학’, ‘대사관 연계 시민대학’ 등 프로그램도 무척 다양하구요.

여기에 더해 올해 시작한 시민석사에 이어 시민박사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2022년까지 ‘천만 시민의 종합교양대학’이 되겠다는 청사진이 장밋빛만은 아니구나, 조금 노력하면 실현 가능하겠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 시민대학의 방향성 정립

박미경 : 30년 가까이 기자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언론에 몸담게 되셨나요? 기자생활을 통해 보람을 느꼈던 사례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정재권 : 제가 기자 시절 이런저런 강의 자리에 서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늘 받게 되는 질문이 ‘기자가 되려면 뭐가 필요하냐’는 것이었어요. 제 대답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호기심.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라는 궁금증이 컸어요. 두 번째는 대학에 들어가 세계관을 정립하면서 제가 의미 있게 생각했던 게 공동체였어요.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가 제 삶의 중심이 됐죠. 이렇게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관이 결합된 직업이 뭘까 고민해보니 답이 기자였어요. 마침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물로 한겨레신문사가 탄생했고, 저곳에서 기자를 한다면 의미가 있겠다 싶어 한겨레에 지원했지요. 사실 첫 번째 도전에서 떨어지고 재수생으로 1990년에 입사했는데, 돌이켜보면 재수라는 과정이 제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했던 탓인지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28년간 일했는데, 특별히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람과 의미를 이야기하기보단, 우리 공동체를 조금 더 건강하고,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드는데 작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훈 : 언론인으로서 학장님의 경험이 시민대학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정재권 : 기자는 흔히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저는 전형적인 제너럴리스트의 길을 걸었어요.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 등 여러 영역을 두루 취재해서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내세울만한 게 없네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경력이 세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세계의 변화를 전망하는 힘을 길러줬다고 생각합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시민대학의 방향성 정립에 우선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대학은 열린 공간 즉, 오픈 플랫폼이잖아요? 우리가 자체적인 강의 역량을 갖추고 있진 않지만, 대신 바깥의 수준 높은 콘텐츠들을 이 열린 공간으로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언론 경력으로 쌓인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바깥의 좋은 콘텐츠가 시민대학이라는 허브로 모이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걷기, 읽기, 듣기, 쓰기

박미경 : 어떤 취미가 있으세요?

정재권 : 걷기를 좋아해서 지인들과 시간 나면 걷거나 등산을 합니다. 지난해 퇴사하고 서울의 둘레길 157Km를 완주했어요. 서울에서 40년 가까이 살았고 기자 생활을 해서 서울을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둘레길을 걸으며 구석구석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요즘도 2주일에 한 번 정도 주말엔 등산을 합니다. 주중에는 짬이 나면 책을 읽거나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음악은 주로 1960~70년대 팝, 70~80년대 가요를 즐겨 듣습니다.

 

김종선 : 학장님은 어떤 배움의 여정을 지나오셨나요? 특별한 배움의 경험이라든가 그 과정에서 만난 인생 멘토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정재권 : 앞서 말했지만 저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고 제너럴리스트에요. 잡식성이라 한 분야에 몰두해 전문성을 키우는 데엔 소홀했어요. 대신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지난해 신문사를 그만둔 뒤 책을 읽으며 새로 시작한 습관이 독서일기예요. 2주에 한 권 정도 독서일기를 쓰고 있는데, 크게 세 가지를 기록합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자의 논지에 되도록 비판적인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적습니다. 3개월이 지나면 독서일기를 보며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복기해 봅니다. 저보다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독서 후에 어떤 형태로든 책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종선 : 좋은 책 좀 소개해 주세요.

정재권 : 최근에 읽은 책 중 좋았던 건 엘리자베스 워런의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와 홍성국씨의 <수축사회>입니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하버드대 교수로 지금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죠.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처방을 담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심화한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 출신의 홍성국씨는 <수축사회>를 통해 성장제일주의로 달려왔던 우리 사회가 수축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다각도로 설명하고, 이런 인식을 가질 때에만 미래를 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제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준 분들이 많기 때문에 인생 멘토를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지만, 굳이 한 분을 꼽는다면 한겨레신문사 사장이셨던 송건호 선생님입니다. 그 분의 책들은 제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무엇보다 언론인으로서 정론직필의 모범이셨죠.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도 큰 기여를 하셨구요. 개인적으론 제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말년에 파킨슨병을 얻어 고생하시다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고 죄송합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노력, 학습

이상훈 : 서울시민을 평소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그들에게 필요한 건 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재권 : 어려운 질문인데요.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이고, 활력이 넘치고 다이나믹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경쟁이 심하고 불평등이 축적된 도시인 것도 맞구요. ‘20 대 80’ 더 나아가 ‘1 대 99’의 사회라는 말이 있는데,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부분이 실패의 영역에 들어와 있으니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경쟁의 승패 여부를 떠나,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학습이라고 믿습니다. 학습은 혼자서도 가능한 영역이 있지만, 더불어 하는 학습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더불어 학습하고, 함께 사회를 바람직하게 바꿔갈 때 삶의 주인이 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학습이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다채롭고 깊이 있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선 : 학장님이 보기에 미래사회는 어떻게 바뀔까요?

정재권 : 이건 미래학자가 답해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웃음) 4차 산업혁명이나 기술사회 같은 세상의 변화 흐름을 잘 이해하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그것과 동시에 인문학적 입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데려가 줄까? 그런 세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를 더 좋게 만들까?’ 같은 질문을 해보는 거죠. 이 질문은 뛰어난 리더 몇몇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답을 낼 수 없다고 봐요. 이런 시대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갖춰야 할 인문학적인 성찰과 고민, 학습을 제공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곤충의 눈, 새의 눈, 물고기의 눈으로 보라

박미경 : 질문들이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이제 현실로 돌아오겠습니다. 학장님이 바라는 시민대학의 조직문화가 있다면요?

정재권 :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조직도 자기주도성, 주체성이 관철됐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지시하는 걸 잘 수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조그만 것이라도 좋으니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왜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하는 식으로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런 물음이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교류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겠어요. 자꾸 물음을 던져주세요.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내가 감수하겠다 하지 말고요.

또 각자 맡은 일을 잘해야 전체가 잘 되겠지만, 그럼에도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건 구성원들한테 하는 당부라기보단 저한테 하는 당부인데, 제가 독서일기에 써놓은 문장을 하나 들려드릴게요. “곤충의 눈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보고, 새의 눈을 통해서 높은 곳에서 보고, 물고기의 눈을 통해서 물결, 그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이상훈 : 시민대학을 이용하는 학습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당부는 없나요?

정재권 : 시민대학의 학습자들은 이미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너무 감사하죠. 그분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가셨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도록 저희들이 열심히 돕겠습니다. 시민대학에서 일하게 되면서 평생학습이 뭔가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평생학습이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