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베타 테스트가 있다면

 

인생을 살다보면 꼭 변하는 시기가 온다. 이 시기가 되면 지금 서 있는 길이 맞는지 의심도 되고, 다른 길로 가볼까 고민도 되고, 혹은 한 발짝 더 내딛어도 안전할지 걱정도 된다. Go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판에 걸 돈이 없어 Stop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마음 놓고 ‘베타 테스트(소프트웨어 등을 공식 발표하기 전 오류가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미리 써 보는 테스트)’ 해 볼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청년인생설계학교가 2019년 가을학기에 들어 그런 기회를 마련했다.
<자율기획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청년인생설계학교 태초에 <자율기획 프로젝트>가 있었다.
2017년 서울청년의회에서 이혜민 의원이 ‘서울형 청년 갭이어 도입’을 제안했고, 이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시 정책에 맞도록 공공형 갭이어 프로그램을 설계·지원하고,
개인의 갭이어 활동도 직접 지원하며 전 세대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자기주도형 갭이어 프로그램 지원 등을 검토하겠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 2018년, 서울형 갭이어 지원 사업 ‘청년인생설계학교’가 닻을 올렸다. 서울 내 다양한 공공과 민간 자원을 엮어내 14개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이는 스스로 돌아보고 사회를 경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꾸려달라는 청년들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였다.

허나 청년인생설계학교가 주체적인 인생을 살도록 돕는 곳인 만큼, 청년들이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계획하고 실행해보는 기회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당초 정책 제안에도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있지 않던가. 이런 배경에서 <자율기획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자율기획 프로젝트>는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삶의 다음 도약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지원한다. 청년들이 인생의 여러 선택지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으니, 성패에 좌우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안전한 기회가 한 번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참여자는 프로젝트 수행에 드는 비용을 최대 2백만 원까지 지원받아 자율적으로 집행한다. 수행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전문 퍼실리테이터의 조언도 받을 수 있다. 개인으로 활동하지만, 2주마다 다른 참여자 2~3명과 만나 서로의 진행 과정을 살펴주거나 정보를 나눈다. 매월 마지막 주에는 모든 이가 모여 공유하는 시간을 보낸다. 단순히 비용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본’까지 지원하는 것이다.

 

 

각자 사연도 하고 싶은 일도 다르지만

프로젝트 아이템이 얼마나 괜찮은지 보다는 이번 도전이 자신의 삶에 미칠 영향과 의미에 중점을 두고 서류 심사와 그룹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결과 지원자 42명 중 15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해 영상 프로덕션에 입사했어요. 전공을 살려 취직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제가 마치 부품이 된 기분이었어요. 밤낮없이 일만 하다 어느 날 한강에 촬영을 나갔는데, 서울에 처음 왔던 때가 생각나더라구요. 서툴지만 이 일을 사랑했던 제 모습이요. 그래서 온전히 제 힘으로만, 제 시선에서 보는 서울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요.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첫 걸음이 될 거예요.”

 

 

“졸업 후 다니던 첫 직장을 11년 만에 그만 두었어요. 배우라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건 해봐야겠다는 마음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어요. 하지만 매달 들어오던 월급도 없고, 새로운 걸 시작하려니 지출은 많아지고… 큰 결심을 하고 그만두었는데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부딪혔어요.”

잘나가는 주말 연속극 보조 작가였지만 마음과 건강이 소진되어 버리고 ‘사랑에 이별이 있듯, 꿈과 이별하기로’ 마음먹고 새 출발을 앞둔 이도 있고, 청년인생설계학교 여름학기 참여를 계기로 퇴사를 결심하고 남은 한 해 동안 자신을 새롭게 찾아보려 마음먹은 이도 있다. 각자 사연도 하고 싶은 일도 다르지만, 15명 모두 인생의 변곡점에서 또 한 번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디 인생이 뜻대로만 될까

9월 6일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지금까지 2/3의 시간이 흘렀다. 참여자 모두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인생 프로젝트’였기에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높은 계획을 제출했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뜻대로만 될까, 머릿속 계획을 현실로 꺼내니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장애물들이 생긴다.

지하철 예절 캠페인, ‘잠실지내 : 잠시만요, 실례할게요, 지나갈게요, 내릴게요’를 추진하고 있는 세규님. 기획안이 워낙에 잘 짜였기에 문제없이 진행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고작 15초 영상을 찍기 위해 한 달 내내 촬영을 해야 했고, 외국인 대상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직접 영어 질문도 준비해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만난 외국인은 서울 지하철을 칭찬하기 바빴다고. 왜였을까? 서울 시민에게 서울 지하철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인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노래를 작곡하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계획했던 미선님. 주로 외주 프로젝트를 맡는 프리랜서다. 워낙 많은 프로젝트를 해봤으니, 자신의 것도 잘 해낼 거라는 자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일만 하는 ‘남의 프로젝트’는 기준이 남에게 맞춰져 있어 일정 상한선만 달성하면 됐는데, 막상 ‘내 프로젝트’가 되니 모든 단계마다 최고로 잘하고 싶은 욕심에 진도가 잘 안 나간다고.

오히려 생각치도 못했던 점에서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다. 평소 환경 보호 운동에 관심이 많아, 이를 주제로 굿즈를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을 하겠다던 유진님. 큼직한 주제는 나왔지만 구체화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모임에 종이컵(!)을 들고 오는데…
소그룹 멤버들에게 진정성을 의심받고 주제의 방향이 살짝 수정된다. ‘비기너(Beginner)를 위한 환경보호 실천 패키지’. 환경에 관심은 있지만,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위한 작은 습관을 만드는 달력을 제작하고 있다.
이렇듯 소소한 실패나 우연한 기회가 반복되는 과정이 곧 인생일 터. 단순히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것을 넘어 매 순간 배움과 성장이 교차하고 있었다.

 

‘대단한 변화’만 중요한 게 아니라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이들을 돕는 사람이 있다. 서울시 청년허브와 금천구 청춘삘딩 등 최전선에서 청년들을 위한 일을 해 온 김희정 프로젝트 어린이 대표이다. 김 대표는 서울의 여러 청년 프로젝트 지원 사업을 거쳐, 참여자 개개인을 세심히 살펴보는 이번 첫 시도를 청년인생설계학교와 함께 하고 있다. 힘들지는 않으시냐 물었더니 품이 드는 건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답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일이라는 무게를 기꺼이 안고 있는 듯 했다.

“이 사업으로 대단한 변화를 만든다기보다, 개인의 인생에 전환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죠.”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덧붙였다. 결과의 산출, 목표의 달성이 전부인 기존의 지원 사업을 탈피해서 계획서와 결과보고서 이면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목표를 세우기까지의 상황과 마음, 목표를 세우는 그 과정 자체를 주목해야 합니다.” 청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하는 그에게서 온 마음을 다한 응원이 느껴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생각해본 적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장래 희망이 못내 아쉬워서, 혹은 다 때려 치고 치킨집이나 차려볼까 하는 욱하는 마음에 갑자기 클래식 기타를 충동구매하거나 ‘4차 산업혁명시대의 창업’이라는 온라인 강의에 눈길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0에 수렴하는 통장 잔고가, 토끼 같은 자식들 얼굴이, 번듯하게 취직했다며 기뻐하는 부모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차마 이 루트를 벗어날 수가 없다면? 그런 당신에게 권해본다. 나만의 <자율기획 프로젝트>를 해본다 치고, 계획서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어느새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싶은
청년들을 위한 서울형 갭이어(Gap-year) 프로젝트로,
2017년 서울청년의회의 정책 제안으로 탄생했다.
혼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폭 넓은 경험, 평소 생각하기 어려웠던
나와 세상을 향한 탐구,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또래와 만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