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자살하지 않았다!

 

2019 총신대 대학연계 시민대학과 함께하는 아트 앤 콘서트

 

12월 17일은 서울자유시민대학 네트워크 데이였다. 1년 간 수고하신 강사, 학습자, 매니저 등 관계자들이 모여 책거리 겸 송년회를 여는 자리였다. 시민대학 본부에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사가 이어졌다. 그 중 네트워크 데이의 스타트를 끊은 행사가 바로 ‘고흐, 삶을 그리고 그림을 연주하다’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아트 앤 콘서트였다.

평일 아침 10시 반부터 시작되는 행사였는데도, 넓은 시민홀이 꽉 찰 정도로 많은 학습자들이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시민대학 로비에는 루돌프 뿔 모양의 머리띠나 산타클로스 모자를 쓰고 즉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고, 바구니에는 포춘쿠키가 담겨 있었다. 운영진들의 권유로 루돌프 뿔모양 머리띠를 썼지만 머리통이 너무 커서 자꾸만 머리띠가 치솟는 바람에 결국 벗어놓고 사진을 찍는 굴욕을 당한 후 시민홀로 들어가 착석했다.

 

 

 

 

시민대학의 1년을 마무리하는 네트워크 데이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 정재권 서울자유시민대학장 님의 인사말이 있었다. 지난 1년 간 1만8천명의 학습자들이 500여 강좌에서 수강을 했고, 그분들 모두 소중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아부를 아주 빠르고 짧게 해주시고 내려가셨다. 인사말의 미덕은 짧은 거라고 생각하는 기자에게는 아주 흡족한 인사말이었다.

 

 

이어 아트 앤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이 콘서트는 무대 위의 하얀 스크린에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 한 장씩 넘어가는 동안 안인모 피아니스트의 라이브 클래식 연주를 들으며 그림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한다. 연주가 끝나면 라영환 교수가 고흐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모두 9번의 연주와 그림 감상이 진행되고, 그 사이사이 고흐에 대한 강연이 이루어졌다. 곡은 007주제가부터 쇼팽의 야상곡, 트로이메라이, 캐러비안의 해적 주제가 등 귀에 익숙하고 듣기 쉬운 곡들이었고, 그에 따라 고흐의 초기작, 자화상 등 주제별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기자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고, 국내외에서 원화도 제법 봤으며,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를 모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2번이나 읽고, 고흐의 그림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러빙 빈센트>도 본 고흐의 팬이지만, 그의 자살에 의문을 가진 적은 없다. 그런데 라영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고흐가 자살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니 자살한 게 확실히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하…애재라, 통재라. 이게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들어보자.

 

 

자살이라기엔 석연치 않은 점들

미스터리한 007주제가로 포문을 연 뒤 라교수님은 고흐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살할 때 권총을 입에 물거나 관자놀이나 심장을 조준해 쏜다. 그런데 고흐는 옆구리를 비껴 쐈다. 이는 군대를 다녀온 분이라면 누구나 근거리에서 쏜 게 아니라 원거리 사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다가 자살을 시도했던 고흐가 실패 후 살겠다고 도보로 20분가량 걸리는 하숙집까지 걸어갔다. 그때까지 살아있었으나 당시 마을에 의사가 없어 불러오느라 하루가 지체되었고 그 동안 고흐는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자살하려던 사람이 살겠다고 20분을 걸어올 수 있을까? 설사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때 고흐의 주머니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가 한통 들어있었다. 자살 시도였다면 유서가 들어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편지 내용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였고, 마지막에는 물감이 모자라니 보내달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과연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편지라고 할 수 있는가?

 

 

귀를 스스로 자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광기의 화가이며, 자살했다는 색안경을 쓰고 보니 그의 그림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해를 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까마귀가 있는 밀밭’ 그림이다. 한국의 어떤 교수조차 밀밭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고, 까마귀는 불길함의 징조라고 해석했지만, 유럽에서는 까마귀가 흉조가 아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밀이 누운 방향으로 바람의 방향을 유추할 수 있는데 까마귀 떼가 까맣게 날아온 게 아니라 바람에 밀려 떠나가고 있다. 고흐에게 밀밭과 까마귀가 절망이 아니라는 사실은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흐는 “까마귀 떼를 보았어.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하나님이 이 땅을 새롭게 할 거야.”라고 썼다. 까마귀에서 절망이 아니라 곧 봄이 되리라는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고흐가 미쳤다는 오해는 귀를 자르는 사건 때문에 빚어졌다. 라교수님은 개인적으로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게 아니라 고갱이 잘랐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 근거를 보자면, 보통 스스로 귀를 자르기 위해서는 자기 귀를 잡고 칼을 아랫방향으로 내리쳐야 힘이 덜 든다. 그런데 고흐의 귀는 사선으로 잘렸다. 혼자 잘랐다기엔 부자연스러운 각도이다. 당시 현장에는 고갱과 고흐 밖에 없었는데, 고갱은 당시 펜싱에 심취해 있어 고흐의 집에 펜싱칼과 마스크 등을 가져갔으며 그걸 두고 가서 돌려준다고 고흐가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 편지에 고흐가 귀 모양을 그려놓았다. 이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고흐가 자해했다는 말에 경찰에서 고흐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지만 의사가 정신병이 아니라며 일주일 만에 귀가조치를 했다. 이후 생 레미 정신병원에 갇혀 독방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생레미 정신병원은 정신병원이 아니라 요양병원이었다. 나이든 환자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었다. 고흐는 그 병원에 있으면서 개인 작업실을 썼고, 무려 200여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어떤 정신병원에서 위험한 환자에게 개인 화실을 내주었겠는가? 유화를 그리려면 나이프, 붓 등 무기가 될 수 있는 도구를 써야 하는데.
또한 프로이트 밑에서 일한 정신과 의사 가셰 박사와 하숙집 주인은 딸의 초상화를 고흐가 그리도록 허락했다. 만약 고흐가 위험한 정신병자였다면 그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딸들을 모델로 그리라고 허락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가난하지 않았던 고흐

고흐의 신화 중 또 하나 유명한 것은 살아생전 고흐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그림을 딱 한 점 밖에 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고흐가 부자는 아니었지만 동생 테오로부터 1달 생활비 250프랑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우체부 월급이 160프랑이었으니 그는 풍족한 건 아니어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고흐가 27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미 삼촌이 10점의 그림을 사줬고, 탱기 영감이 3점을 샀다는 기록도 있다. 최소한 살아 생전 14점 이상을 팔았다. 또 고흐가 죽을 당시 고흐의 그림은 전부 테오에게 있었는데, 이는 테오가 아트딜러였기 때문이다. 즉 테오가 형을 불쌍히 여겨 도와준 것이 아니라 아트딜러로서 형에게 투자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물론 고흐는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해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역사상 렘브란트 다음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 덕분에 그는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되고 더 잘 알게 되지 않았을까?

 

 

사람과 사물을 보는 시선의 따뜻함

이렇게 고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색안경을 벗고 오롯이 그의 작품만 보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고흐의 그림은 원근법이 잘 맞지 않는다. 고흐는 미술학교에서 정식 공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원근법에 서툴렀다. 몇 년 간 연습을 하다가 그는 결심한다. 못하는 걸 포기하고 잘 하는 걸 더 열심히 하기로. 그렇게 해서 원근법에는 어긋나지만 감상자에게 더 와닿는 고흐만의 풍경화가 탄생했다. 둘째, 고흐의 그림은 따뜻하다. 구두 그림, 감자를 먹는 사람들 그림을 보면 구두와 사람들을 보는 시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고흐의 그림에선 대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그걸 보는 시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직접 빵을 굽고 불을 피우고 농사를 짓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는 원래 목사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인데, 화가가 되어서도 사람들을 돕고, 자기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휴식을 주고 싶어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스스로 가장 자부심을 느꼈을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려놓고 고흐는 스스로 렘브란트급이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 그림은 꼭 금색으로 칠해진 벽에 걸라고도 했는데, 그것이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대로된 대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흐가 그린 그림 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누드 스케치가 있는데, 그 모델이 시엔이다. 그녀는 아이가 하나 있는 창녀였는데, 당시 임신도 하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 몸을 팔고 있었던 그녀에게 고흐는 모델일을 제안하며 돌봐주었다. 그녀가 둘째 아이를 낳은 뒤 첫아이가 동생을 보는 모습을 마치 예수를 경배하는 동방박사의 구도로 그린 작품도 있다. 시엔을 불쌍히 여겨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것 등을 보면 고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은 화가였다. 이는 고갱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고갱은 자신을 레미제라블로 표현하거나 예수의 머리에 자기 얼굴을 그리는 등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한 작가였다. 다른 사람을 그릴 때는 그들을 깔보는 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는 다른 사람들을 그릴 때도 배려하고, 그들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렸다.

 

상처받은 치유자 빈센트

고흐의 ‘아이리스’를 보면 보랏빛 아이리스들 중에 하얀색 아이리스가 한 송이 있는데, 이게 바로 고흐 자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외로웠지만 홀로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화가, 그가 고흐다. 그는 상처받은 치유자였다. 스스로 상처받았으면서도 그걸로 남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더 공감하고 상처를 보듬어줬다. 마지막 시기 그의 그림을 보면 최선을 다한 삶에 실패는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고흐는 1880년에 이런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침묵하고 싶지만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이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쓸모 있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물 한잔을 건네주는 것이라고… 깊고 참된 사랑이 있어야 해.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어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힘이자 신비한 힘으로 감옥을 열게 되는 거지. 그게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아. 그러나 사랑이 부활하는 곳에 인생도 부활하지.”
마지막으로 고흐가 100년 뒤로 타임슬립하여 자신의 그림이 오르세 미술관의 한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BBC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데, 보는 나도 감격하여 목이 멜 것 같았다.

 

 

그림과 음악이 어우러진 1시간 반의 놀라운 시간

안인모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를 라이브로 들으며(그녀는 심지어 2명이 쳐야하는 연탄곡을 팔꿈치까지 동원해 가며 혼자서 쳐내는 기염을 토했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런 고급한 문화를 아무 댓가 없이 이렇게 향유해도 되나 하는 죄책감까지 드는 시간이었다. 때로 벅차고, 때로 행복한 1시간 30분이 흘렀다. 그 시간 속에서 들은 음악과 본 그림들도 좋았지만, 내가 이제까지 고흐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흐는 항상 자신의 그림에 빈센트라고 서명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 고흐라는 성으로 불렀다. 그래서 콘서트가 끝나고 나오는 길, 이제는 고흐가 원하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졌다. “안녕, 빈센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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