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學習)! 내 안의 흥(興)을 깨워라!

「다들, 깨움 : FOCUS」는 평생교육 영역의 전문가 기고로 꾸며집니다. 평생교육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정보, 그리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드립니다.

학습은 성공의 지름길?

세상이 때 아닌 수저 논쟁으로 뜨겁다. 2015년 SNS 사용 단어 빈도수 1위를 차지한 ‘흙수저’ 논쟁은 인간의 삶은 능력이나 노력이 아닌 부모가 물려 준 수저의 색에 의해 결정된다는 젊은이들의 자조(自嘲)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심지어 인간의 생존이, 지적 능력을 결정하는 전두엽의 색이 아닌, 부모에게 물려받은 수저의 색에 의해 결정되는 불합리 사회를 못 견디겠다며 유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명문대생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 성장이 정체될수록 빈부의 차는 더욱 커지고 그 사이에 계층 간에 더 큰 장벽이 만들어진다. 이미 기회를 잃은 노령화된 사회는 더 이상 노력과 열정만 가지고는 그 큰 장벽을 돌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실 상황에서 이제 공부와 학습은 더 이상 흙수저를 금수저로 바뀌게 하는 미다스(Midas)의 비방(秘方)이 아니며, 계층을 넘나드는 무지개다리도 아니다. 과거시험에만 합격하면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수직상승했던 조선시대 관념이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학습의 목표는 바뀌어야 하고, 학습의 동기는 수정되어야 한다. 출세나 성공의 과정이 아닌 그 무엇으로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동양에서 학습은 독서인(Literate)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기능을 해 왔다. 학습하는 책 속에 출세(權)가 있고, 돈(財)이 있고, 미인(色)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경구(警句)는 많은 사람들의 학습 동기를 유발하였고, 실제로 독서를 통해 학습이 완성된 사람들은 관리로 선발되어 세속의 출세와 성공을 보장받기도 하였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바로 효도이고 충성이었던 시절,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오로지 학습과 공부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고, 흙수저가 금수저 되기란 학습만 가지고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의 재력과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비싼 학비와 기간이 필요하다. 이제 어느 고시원이나 깊은 산 속 절간에서 잠과 싸워 가며 공부와 학습에 전념한다 해도 사회에는 더 이상 그들의 열정을 받아줄 공간이 줄어들었다. 물론 여전히 학습은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새롭게 무장된 지식으로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게 해주긴 하지만 옛날처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러면 이 시대 출세의 도구로서의 학습은 여전히 유효한지, 학습의 목표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수정된 목표와 지향점에 합당한 학습의 형태와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일정 기간학습에서 평생학습으로 학습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할 점이다.

학습은 삶에 반영되는 것

아시아적 가치(Asia’s value)를 가장 잘 보여주는 <논어>의 첫 구절은 ‘학습’이란 단어로 시작한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습(學習)’이란 단어의 가장 오래된 동양 문헌이다. 공자는 당시 새로운 인간형인 ‘군자(君子)’를 정의하면서 ‘학습하는 인간’으로 규정하였다. 군자는 배움과 실천을 통해 살아가는 ‘학습실천형 인간’이라는 정의다. ‘배우고 배운 것을 습득 실천하니 또한 인생의 기쁨이 아니던가?’ 배움(學)은 습득(習)을 통해 인간의 삶에 반영된다. 지식이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실천적 노력(習)을 통해 인간의 삶에 크게 개입한다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학습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학습은 지식의 축적과 축적된 지식의 삶의 반영이다. 습(習)은 ‘우(羽)’와 ‘백(白)’의 합자(合字)로 갓 태어난(白) 새가 쉼 없는 날개 짓(羽)을 통하여 나는 본능을 그 새의 삶에 반영하여 결국 날라 오름(飛)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차별화된 점이 있다. 인간은 지식 습득 과정을 거쳐 자신의 삶을 더욱 고양시키고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다. 인간은 하늘(天)의 또 다른 모습이며 인간의 내면(性)에는 하늘다움(天性)이 이미 투영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인간은 학습을 통하여 하늘다움의 실현(天人合一), 곧 인간의 완성형인 군자(君子) 또는 성현(聖賢)이 되는 것이다. 앎에 대한 사랑과 무지(無知)에 대한 부끄러움을 갖고 학습을 통하여 얻은 배움은 반드시 내 삶에 반영되어 실천되는 것이 진정 학습의 위대한 여정이다.

학습하는 인간(Homo Academicus)

73년의 인생을 살다 간 공자의 정체성은 ‘학습하는 인간’(Homo Academicus)이었다. 스스로 학습을 자신의 평생 프로젝트(憂)로 생각하였고, 살아 있다는 것은 학습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겐 평생 근심(憂)이 있다. 내 인격이 제대로 수양되지 못하는 것, 배움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것, 옳은 것을 학습하고 삶의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 좋지 못하다고 깨달은 것을 내 삶에 반영하여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내 인생에 가장 근심이다.”<논어 술이편> 공자의 이 말은 학습하는 인간의 삶이란 인격의 수양(修德), 학문의 연마(講學), 가치의 실천(行義), 선한 삶의 실천(改善)에 있다는 의미다.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공자는 그의 삶 속에서 학습된 인간이야말로 위대한 인간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도출해 내었다. 고대문명을 지식이란 새로운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그 지식을 가공하여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콘텐츠를 만들어 전수하고 전파한 공자야말로 교사(학습의 전파자)라는 직업을 처음 만들어 낸 ‘만세사표(萬世師表)’의 교육 실천가였다. 공자 이후로 학습은 위대한 인간 삶의 여정이 되었으며, 학습의 의미 속에 ‘평생학습’이란 뜻은 동양의 독서인들이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복응(服膺)한 과제가 되었다. 인간의 죽음 뒤에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위패에 새겨진 글은 ‘나는 죽어서도 학습하는 인간(學生)’임을 자손에게 알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학습은 평생 삶 속에서 진행되는 평생학습일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학습은 포기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였다. 이런 맥락에서 학습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지식의 습득도 아니고, 출세나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며, 지식을 통해 우월적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습은 내 안에 있는 영성의 만족, 어제 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한 무지의 깨우침, 보다 성숙하고 세련된 인간관계를 위한 본성의 개발, 지속적인 중용적 삶의 유지를 위한 평생의 학습이었다.

학습은 내 영성의 행복

“군자의 학습 목표는 내 영성의 만족을 위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爲己之學). 남에게 과시하거나 군림하기 위한 학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爲人之學).” <논어>에 나오는 이 구절은 학습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글이다. 타인의 평가나 시선을 위한 학습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목표로서의 학습은 평생 학습의 핵심가치이기도 하다. 노인이 되어 스페인어를 배우거나 예술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학습의 열정과 노력을 다하는 분들을 보면 진정 ‘위기지학’의 진면목을 본다. 그 분들에게 있어서 학습은 성공의 도구가 아닌 배움의 행복 그 자체이다. 어디에 써 먹을 것인가가 학습의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 동기를 지나면 배움 그 자체에서 행복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배움을 통해 위대한 영성의 행복감을 느끼고, 학습의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 속에 놓여진 나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학습의 위대한 효용성이다. 자격증을 따고, 졸업 증서를 통해 얻는 학습의 기쁨은 잠깐이며 공허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그 인정에 내 영혼의 만족감이 결여되어 있다면 만족감을 지속시켜줄 수 없다.

학습은 지식이 아닌 실천

“나보다 성숙된 사람을 존경하고, 부모를 성심껏 모시고, 조국을 위해 혼신을 다하고, 친구들과 믿음으로 관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지식적 학습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진정 학습된 인간이라 할 것이다!” <논어>의 이 구절 역시 학습은 지식의 습득 정도가 아니라 삶에의 반영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격증과 읽은 책도 많고, 다양한 학습과정도 많이 거쳤지만 정작 그 배움이 삶에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명 배움 따로 실천 따로, ‘따로 학습’이다. 학습을 마치 남에게 자랑하려고 산 명품 백처럼 생각하고 보여주기만 할 뿐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널려 있는 정보 저장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비록 학습이 문자를 통해 얻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학습이 본질적으로 꿈꾸는 기본을 갖춘 인간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 어떤 지식을 갖추 사람보다도 슈퍼지식인이다. 인류는 바람직한 삶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많은 지식을 축적하여 왔다. 그러나 그 지식의 축적은 삶의 실천에 대한 후속적 정리 작업이었다. 지식이 축적되어 문서와 문자로 남을 때 실천이 결여된 학습이 이루어질 상황도 발생하였다. 많이 배우고 아는 사람인데 인격이 결여되어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과연 학습한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학습의 양과 정보가 적더라도 삶이 그 지식을 실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 학습된 자라고 정의한 공자의 말 속에는 학습의 목표는 실천에 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남들이 자고 있는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깨끗한 출근길을 걷기를 희망하며 땀을 흘리며 청소하는 청소부, 음식점에서 힘들게 서비스 하는 직원들에게 수고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수 있는 손님,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이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출근하는 직장인들, 이들이야말로 진정 학습이 삶에 실천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학습! 내 안에 흥(興)을 깨워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하늘다움의 영성에 대하여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천성(天性)이라고도 하고 천덕(天德)이라고도 하는 이 위대한 인간의 영성을 우리 전통적 표현으로 흥(興)이라고도 한다. 흥(興)이 난다는 것은 잠자고 있는 내 영성이 깨어난다는 것이다. 흥이 나면 힘든 것도 잊어버리고, 충만한 행복감에 만족감을 느낀다. 흥이 나게 일하고, 흥이 나게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현세에서 꿈꾸는 행복의 극치이기도 하다. 평소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60조 개의 세포 중에 절반도 불이 안 켜져 있다고 한다. 이 불 꺼진 세포에 불이 환하게 켜질 때 인간의 흥은 절로 나게 된다. 성공과 출세가 흥이 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경쟁과 투쟁을 통해 얻은 흥은 언제나 목마르고 갈증이 동반된다. 세속의 성공은 늘 비교 대상이 있어서 또 다른 성공에 대한 갈증을 유발하고, 또한 성공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내 성공은 어떤 사람에게 실패와 좌절이기도 한다. 전통 사회와 근대 사회에서는 성공을 누가 먼저 쟁취하느냐가 발전의 동력이었고 사회적 가치였다면, 이제 다음에 맞이할 미래 사회에서는 더 이상 비교와 경쟁 속에 승자와 패자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그런 성공만 갖고는 온전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흥은 무한한 자원이며 비교와 경쟁이 아닌 나의 문제이기에 미래 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새로운 가치가 될 것이다. 학습의 목표는 분명하다. 내 안에 잠가고 있는 흥을 깨우는 도구가 바로 학습이다. ‘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不知手之舞之足之跳之)’ 주자(朱子)가 <논어>를 학습하는 학습자가 이르는 최고의 경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논어>를 학습하면서 ‘내 손이 춤추고 있는지 내 발이 뛰고 있는지 모를 정도’의 흥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논어의 학습을 제대로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학습의 최고 경지는 손과 발이 춤추고 뛰는 것도 모르고 흥이 나는 것이다. 학습은 내 영혼의 흥을 깨워 충만한 행복과 만족감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새로운 평생학습의 목표가 있다면 학습을 통해 잠자고 있는 흥을 깨우는 것으로 설정해야 한다. 내가 흥이 나면 주변 사람이 흥이 나고, 흥이 나는 사회는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미래 사회이기 때문이다. smile-symbol

박재희

박재희

포스코 전략대학 석좌교수 역임
현 서울시 문화재 전문위원
민족문화콘텐츠 연구원장